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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사랑한 이에게 내린 비극

르네

 

메이플스토리

매그너스 X 르네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시에, 피부는 백설 같고, 눈동자는 흑옥 같고, 머리카락은 흑단 같은 사랑스러운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여자아이는 어디에도 존재했으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존재는 어떤 세계에서든 단 하나였으며, 어디에서도 끝맺음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시작은 아주 먼 것으로, 창세라 하여도 좋을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야만 이어질 이야기였습니다.

여자아이는 어떠한 이유로, 죽지도 늙지도 망가지지도 않는 몸이 되었습니다. 커다란 늑대가 될 수도 있었고, 자그마한 개미가 될 수도 있는 굉장한 능력도 손에 넣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녀는 그녀만의 작은 세계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끝없이 확장될 수 있는 심층세계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지만, 그러나 존재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자그마한 신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연약한 신은 행성을 호령하고 백성의 제물과 칭송을 받지 않았습니다. 조각상으로 다듬어 두면 훌륭하도록 아름다울 것 같은 반듯한 목선과 둥근 어깨를 두고, 시인이 널리 찬미할 나비 같은 속눈썹과 부드러운 흰 손가락을 두고, 그녀는 다만 사랑스러운 여자아이로 존재했습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그녀는 어떤 세계의 어떤 이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사랑한 것은 난폭하고 변덕스러운 사내로, 그는 흔히 드래건이나 용 따위로 불리는 거대한 파충류의 피를 이어받은 종족이었습니다.
그의 머리에 난 날카로운 뿔은 한 쪽이 비뚤게 잘려 있었고, 큼지막한 날개와 꼬리만을 내놓은 단단한 금속의 갑주에는 희미한 생채기가 나 있었습니다. 볕에 탄 것도 같은 흙빛 피부와 딱딱하게 굳은 손, 그렇습니다, 그는 전사였습니다. 전쟁터를 오가는 것을 극렬히 즐기는 사내였습니다. 폭력에서 쾌락을 느끼고, 살육과 죽음을 누구보다도 가까이 하는 이였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감정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믿지조차 않았습니다. 훅 불면 날아갈 듯한 솜사탕이나 거품 같은 뭉글한 감정 따위보다는, 그의 손에 쥐어진 힘과 권력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고백하는 여자아이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래도 죽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몇 번이나 사랑을 속삭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그를 끊임없는 어둠에 가두거나 강제적으로 굴복시킬 수 있음에도,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신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여자아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내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사내에게 상처받고 고통스러워질지언정,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의 방식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과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몇 날 몇 밤이 흘렀습니다, 아주 긴 나날들이 지났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다 불리던 사내는 여자아이의 존재가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검은 남자이고 사신이라 불리던 남자의 방 안에 부드러운 쿠션이 생겼습니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날카로운 샛노란 눈동자가 부드러운 꿀 색으로 풀렸습니다. 그는 간간히 자신의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언제부터 익숙해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언제나 제 방에 발을 들이는 여자아이가 사랑스럽다는 것에는 이견을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그 여자아이, 사랑스러운 여자아이의 깊디깊은 사랑만은, 그에게 크나큰 믿음과 안식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녀의 사랑은 끝을 가늠할 수 없었고, 그가 어떻게 발버둥 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것이 있다면, 감히 그것이 영원한 것이었습니다ㅡ

여자아이의 그것은 명확한 신체神體로, 그녀의 육체는 칼로 가르더라도 흉터조차 없이 붙었고, 불에 타도 잿속에서 다시 뭉쳐져 태어났습니다. 피와 재에 가려져도 그 흰 육체만은 생채기 하나 없이 말끔하고 아름다워, 부서지지도 뭉개지지도 않고 반듯한 형체를 유지하여 신성하게까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요, 아무리 사랑스러운 여자아이인 척을 하여도, 그녀는 신의 육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고, 신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에게 편애 받은 남자는 명이 길게도 살아남았습니다. 본디라면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간단하게 넘기고, 깊은 잠에 들 수 있게 되었고, 안식을 얻었으며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 ......
그는 신의 사랑을 굳게 믿었습니다. 인간인 그에게 신의 사랑은 ‘영원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랑스러운 여자아이는, 그에게는 차라리 신이었습니다. 연약하고 병든 작은 신을 사랑하게 된 그는 행복했습니다. 그는 제 머리맡을 신이 지킬 것이라 믿었습니다. 

인간은 신을 믿었습니다. 그것이 지극히 불완전하고 상처받아 위태로운 것임을 모르고.


하늘이 맑은 날이었습니다. 사내는 여자아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사랑스러운 신은 언제나 매일같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입가에 띠고 작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르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제법 달콤했습니다. 혹은 그 이름이 달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구름이 참으로 하얀 날이었습니다. 여자아이는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손의 끝이 가루처럼 바스라져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아, 그것은 왜였을까요?

사실은 그 여자아이 신은 이전에도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녀가 사랑한 다정한 인간 남자를 있는 힘껏 행복하게 하고, 그리고 절망으로 스러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그녀가 손댄 결과로 다 쓴 비디오 테이프처럼 되어, 다시 돌리더라도 다른 끝을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세계를 지나더라도, 그 다정한 남자는 이미 그녀가 보았고 행복하게 했던 남자였습니다. 그녀는 필멸하는 이들과 그녀 스스로의 명백한 차이를 느꼈고, 그리고 깊게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신의 육체와 인간의 마음의 괴리로, 사랑스러운 여자아이는 괴로웠습니다. 잠들고 싶은 나날이 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의 육신을 가진 그녀는 잠들 수 없었습니다... ......잠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잠들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녀는 문득 사랑하는 이를 떠올렸습니다. 매그너스, 그 이름을 떠올렸을 뿐인데 붕괴가 가속화되었습니다. 그녀는 몇 번 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더없이 행복하고, 그리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나쁜 꿈에서 갓 깨어난 것처럼,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습니다.


사내는 사랑하는 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낮은 콧노래를 부르며, 그녀가 좋아하는 사탕을 탁자 한 켠에 풀어 두며.

바스락대는 노란 사탕의 포장지가 기묘하리만치 오색찬란하게 빛났습니다. 좋은 꿈 속의 예쁜 광경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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