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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나쁜아이인가요?

Esoruen

 

옥도사변

사이토 X 에노키 X 키리시마

안녕하세요. 저는 에노키라고 해요. 나이는 17살 쯤 되었고, 사이토 씨와 단 둘이서 이 성에서 살고 있어요.
사이토 씨는 저를 어릴 때부터 돌봐준 사람이지만 아버지는 아니에요. 사이토 씨 말로는, 우리 부모님은 나를 버리고 멀리 가버렸다고 해요. 자식을 두고 갈 정도로 먼 곳으로 가버린 거라면, 이제 저를 찾으러 오지는 않는 걸까요? 어찌 되었든 저에게는 사이토 씨 밖에 없어요. 사이토씨는 여러 사람을 만나지만, 결국 성에는 나랑 사이토 씨 둘 밖에 남지 않게 된답니다.

“알겠지? 에노키. 절대 내가 손님과 만날 때는 방에서 나오면 안 돼.”

그건 나랑 사이토 씨가 한 유일한 약속이에요. 저는 제가 자고 싶은 시간에 자고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도 혼나지 않고, 먹고 싶은 건 뭐든 부탁할 수 있지만, 저 약속 하나는 꼭 지켜야 해요. 어떤 손님이 와도, 저는 말을 걸어도 안 되고 대답을 해도 안 된답니다. 물론 방에서 나가는 건 절대 안 되니, 얼굴을 보는 일도 없지만요.
사이토 씨의 손님으로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오간답니다.
젊은 부인부터 나이 든 노신사는 물론, 저랑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이 올 때도 있고, 언젠가는 아직 말도 못 할 정도로 어린 아이가 온 적도 있었지요. 얼굴도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냐고요? 나는 바보가 아니랍니다. 얼굴은 보지 못해도, 대화는 나누지 못해도, 발소리랑 사이토 씨와 대화할 때 목소리로 전부 알 수 있는 걸요.

‘그런데 다들 왜 한 번 밖에 들리지 않는 걸까?’

자랑은 아니지만, 아니, 뽐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사이토 씨는 제가 굉장히 기억력이 좋다고 했거든요. 어쨌든, 제가 기억하기로는 사이토 씨의 손님들은 늘 한 번만 들릴 뿐, 두 번은 오지 않았어요. 예전에 다녀간 기억이 있는 목소리가 나타나는 걸 본 기억이 없으니, 아마 제 생각이 틀린 건 아닐 거예요.
이상하기도 하지. 정말로 이상하지만, 전 손님에 대한 건 아무것도 물어 볼 수 없어요. 저는 ‘착한 아이’니까. 말을 잘 들어야 하는 걸요.

“귀여운 나의 에노키야. 알겠지? 나쁜 아이는 벌을 받는 거란다. 물론 우리 에노키는 착한 아이니 벌 대신 상을 받겠지만. 너도 벌을 받고 싶지는 않지?”
“네. 으음, 벌은 싫어요.”
“그래. 그럼 계속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착하게 있어주면 된 단다. 나는 너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아. 나랑 한 약속만 지켜주면 네가 뭘 해도 좋단다. 언젠가는 바깥세상에도 나가게 해 줄게.”
“괜찮아요. 저는 바깥세상은 별로 관심 없어요.”

성의 바깥은 위험한 것들뿐이니까, 정말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어느 방에도 따뜻한 잠자리가 있고, 부엌에는 늘 먹을 것이 있는 성을 왜 내가 나가고 싶어 할까요. 물론 궁금하기는 하지만, 알고 싶은 게 있다면 책을 찾아보면 되니 상관없지 않을까요.

“그래, 그것 참 다행이구나.”

내 말을 들은 사이토 씨는 무엇이 그리도 기쁜지 환하게 웃으셨어요. 역시, 제가 착한 아이라 좋은 게 분명해요. 
아. 그러고 보니 말이 나온 김에 말하자면, 사이토 씨의 방에는 책이 엄청나게 많답니다. 저는 성 안에서 혼자 노는 것엔 도가 텄는데, 그 중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사이토 씨의 책을 읽는 거예요. 너무 어려운 책은 읽지 못해도, 사이토 씨가 날 위해 준비해 둔 동화책 정도는 읽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어려운 책도 사실 이해를 못 할 뿐. 글자를 읽는 건 가능하니까요.
사이토 씨는 아주 똑똑해서, 전 아무리 봐도 이해하지 못하는 책들을 잔뜩 쌓아놓고 살아요.
‘인체의 재구성’ 이라던가 ‘불노불사’ ‘세뇌의 기초’ 같은 단어들은 아무리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발음이 참 재미있어요. 어쩌면 사이토 씨를 찾아오는 손님들은 모두 사이토 씨에게 수업을 들으러 오는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사이토 씨는 정말 대단하네요. 한 번 가르쳐 주면 다들 이해하고 오지 않는 거일 테니까요.

“에노키, 곧 손님이 올 거란다. 방으로 가련?”
“아, 네! 저 그럼 낮잠 잘래요. 자고 일어나면 같이 간식 먹어요!”
“그래, 꼭 그렇게 하자. 잘 자렴.”

제 이마에 입을 맞춰준 사이토 씨는 저를 방까지 업어주시곤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러 가버렸어요. 오늘도 많이 바쁘실 것 같으니, 저는 정말로 자야겠어요. 나중에 깨어나면 꼭 같이 머핀을 먹자고 해야겠어요. 이 정도 부탁은 들어주시겠죠.
저는,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니까.

 

얼마나 낮잠을 잤을까요. 누군가가 몸을 흔드는 걸 느낀 나는 사이토 씨가 깨우러 왔다고 생각하고 눈을 떴다가 낮선 사람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어요. 밤하늘 같은 짙은 남색 눈동자, 저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얼굴. 처음 보는 남자아이는 뜀박질이라도 한 것인지 얼굴이 땀으로 가득했어요.

“저….”
“넌, 누구야?”
“아. 나는…, 키리시마야. 그것보다, 나 좀 숨겨줄 수 있을까?”
“숨바꼭질이야? 응, 알았어!”

손님이랑은 말하면 안 되는데. 숨바꼭질 중인 사람은 숨겨줘도 되겠지? 저는 착한 아이니까 이 정도는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답니다. 키리시마라 불린 소년을 옷장 안에 숨겨주고 다시 침대 위에 눕자, 조금 뒤 누군가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어요.

“…이런, 자고 있네.”

제가 자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요. 사이토 씨는 제 방을 둘러보더니 곧바로 나가버리고 말았어요. 저 옷장에 키리시마가 숨은 건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아요. 참으로 다행이지요. 보통 저는 숨바꼭질을 하면 늘 지는데, 이번에는 이긴 것 같아요. 내가 이긴 게 아니라, 내가 숨겨준 아이가 이긴 거지만. 그게 그거 아닐까요? 지금 나와 이 소년은, 한 편이었으니까.
사이토 씨의 발소리가 멀어진 후, 조용히 옷장을 열고 나온 키리시마는 대뜸 내 이불을 걷었어요.

“도와줘서 고마워, 너도 얼른 나가자.”
“나가자니? 어디를?”
“여기서 나가야 해. 너도 죽을 거야. 빨리.”
“죽어? 왜?”

도대체 이 애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요. 누가 왜 죽는다는 걸까요. 애초에, 이 아이는 손님이 맞는 걸까요? 왜 이 성에 있는 걸까요. 궁금한 건 한 가득인데, 키리시마는 그저 내 손을 잡고 바깥으로 달렸어요.

“저기, 어디 가?”
“우리 마을. 한참을 달려야 하지만, 살아야 하니까 참아.”
“그러니까, 내가 왜….”

내가 왜 죽느냐고 물으려던 순간,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한 번도 본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토 씨였어요.
무엇이 그렇게 화나신 걸까요. 뭘 하다 오신 걸까요.
잔뜩 화난 얼굴로 가만히 서있는 사이토 씨의 손에선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어요.

“내가.”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사이토 씨는 키리시마와 마주잡은 내 손을 보고는 그렇게 중얼거렸어요.

“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숨겼는데. 하아, 뭐 좋아. 그것 보다 놔주지 않을래? 그 아이는 내 거야.”
“사람은 물건이 아니야. 이 애도 다른 사람들처럼 죽여서 솥에 넣을 거야?”
“헛소리를. 그 아이는 내 모든 것이야. 내가 왜 불사의 약을 만든 줄 알아? 왜 젊음의 비약을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 가며 만들었는데. 감히. 감히….”

아아. 어쩌죠. 사이토 씨, 정말로 화가 나셨나 봐요. 제가 약속을 어겨서, 제가 손님을 만나서. 제가 말만 잘 들으면, 뭐든지 해주시는 분이었는데.

약속을 어긴 나는 이제 나쁜 아이인가요?
나쁜 아이가 된 나는,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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