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아이의 세계
설묘
아르카나 패밀리아
노바 X 스텔라
*주제에 맞추기 위해 창작 세계관의 AU를 적용시켰습니다.
장난감 상자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깨진 거울, 부서진 블록, 찢어진 인형…….
어라?
아, 그건 망가진 상자야.
* * *
톡. 톡. 톡.
그렇게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던 소리는 어느새 쏴아아아, 하고 시원한 소리가 되어 바깥세상을 가득 메웠다. 그러자 얌전히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던 작은 소녀는 책을 덮고, 저가 앉아 있던 의자를 들고서 쪼르르 창문 앞으로 이동했다. 그쪽은 이제 곧 한기가 돌겠지만 어디 그런 걸 신경 쓰는 아이였던가. 소녀가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몇 년 같이 있으면서 깨달은 것은 저 고집 센 꼬마 아가씨에게 괜한 잔소리를 하는 것은 그의 동료와의 영양가 없는 다툼과 마찬가지로 시간 낭비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그냥 신경을 끄고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두었다.
“노바! 하늘이 샤워기가 됐어!”
……아무리 그래도 저런 건 정정해주고.
“그게 아니라, 비가 내리는 거잖아.”
“비?”
“그래. 비.”
굳이 물의 순환 작용까지는 설명해주지 않아도 되겠지. 말해줘도 이해 못 할 테고. 노바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노바에게 맡겨진, 그러니까, 그가 ‘돌보고 있는’ 작은 소녀의 이름은 스텔라. 인간들 사이에서야 조금은 이름 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여자아이였으나, 불행하게도 그 심장이 뛰기 시작한 순간부터 아이는 죽음과 함께였다. 몇 번이고 유산될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고도 사산될 위험성이 크자 아이를 잃지 않기 위해 어머니는 아직 태중에 있는 아이와 사신과의 계약을 이행했다. 사신과 계약하는 것은 무척 어렵고 드문 일이지만, 성사만 된다면 그 계약자는 죽음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었기에. 그만큼 그 대가도 크지만 세상에 나와 눈도 뜨기 전에 꺼져버릴 생명을 지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못 했을까.
그렇게 스텔라를 죽음에서 보호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 노바였다. 결과적으로 스텔라는 지금까지도 잘 살아있다. 그러나 분명한 부작용이 있었다. 스텔라에게 향하지 못한 죽음의 화살이 주변으로 튕겨져 나간 것이다. 제일 처음엔 아끼던 화초, 애완동물, 그 다음엔 친구들, 그 다음엔 부모님마저. 스텔라는 혼자가 되었고, 방패가 되어주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가문에서 쫓겨나 멀리 떠나서 인적 없는 숲 속에 숨어 살아야 했다.
그런 은둔 생활을 둘이서 시작한 지도 벌써 3개월.
“나, 비는 싫은데.”
“이제껏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엄마가 세상이 샤워하는 거라고 했는걸.”
“…….”
정말이지, 뭘 어떻게 바로잡아줘야 할지 생각하기 전에 할 말이 사라져버렸다.
노바는 조용히 미간을 눌렀다. 말이 은둔 생활이지, 노바에게는 단순히 골치 아픈 애보기였다. 더군다나, 지금과 같은,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아이의 순수한 세계를 그래도 지켜주고 싶어서 그 어머니가 불어넣은 이상한 지식들은 더더욱 노바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비가 오면 항상 안 좋은 일이 생겼어.”
“…그랬던가?”
“그랬어. 노바는 나한테 관심 없으니까 모르지? 그치?”
관심이 없는 건 맞았다. 인간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유는 저 꼬마가 계약자이기 때문일 뿐이었고, 계약 조건은 그 계약자를 죽음으로부터 보호하는 것뿐이었고. 노바는 공과 사를 확실히 하는 편이었고, 공무를 수행하는 중에는 그것을 우선시하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일 목적 외에 스텔라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는 것이다.
스텔라는 불만스럽게 작은 뺨을 부풀리고는 촤륵, 하고 커튼을 당겨 창문을 가렸다. 햇빛 좀 잘 받으라고 잠깐 창 밖에 내어놓은 꽃은 잠시 나간 사이 쏟아진 비를 다 맞고 시들어 죽어버렸다. 귀여워라 하던 강아지는 비 오는 날 데리고 나갔다가 한순간에 놓쳐 미끄러지는 마차에 치여 죽어버렸고, 친했던 친구들과 부모님도, 한 명 한 명 빗물에 섞여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단순히 세상이 씻는 것이라고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스텔라에게 죽음의 사랑을 받는 아이라고 피하고 비난했어도 스텔라는 자기 탓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세상이 씻으면서, 더럽고 불필요한 것이라고 여겼기에 함께 씻어낸 것이라고 믿었다.
“비는 그냥 비지?”
“비가 비가 아니면 눈이려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지?”
노바는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엔 제게 토라져있더니, 지금은 또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타박타박 침대로 걸어가고 있다. 기분 상태가 너무 휙휙 바뀌어서 뭘 파악하기도 힘들었다.
“나는 저주 받은 거지. 전부 다 내가 죽인 거지?”
다만 지금 잘못했다는 건 잘 알 것 같다. 꼬물꼬물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아이를 보고 한숨을 삼킨 노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스텔라는 가만히 누워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눈앞에 검은 옷자락이 스치자 휙 이불을 뒤집어써버렸다. 그 옆에 앉아서, 노바는 조용히 머리를 굴렸다. 사신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회수하는 일을 하는 죽음의 천사.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아이에게 어떤 이해를 시킬 필요가 있는 건지 노바는 알 수가 없었다. 생명을 가진 것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일에 스텔라에게 붙어 있는 죽음의 그림자가 영향을 끼친 것은 맞는 것이지만 그게 이렇게까지 우울해질 일인가 이해되지 않았다. 인간의 아이는 돌보기 까다롭다고 했던 동료의 말이 생각났다. 깊이 공감하는 바였다.
“스텔라.”
“…….”
“스텔라. 자?”
“……응.”
…자는데 잔다고 대답하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노바는 어떻게든 인내심을 끌어내어 말을 이었다.
“너는 저주 받지 않았어. 사람은 누구나 죽어. 동물도, 꽃도. 네가 직접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니까 네가 죽인 것도 아니고, 비는… 그래, 따지고 보면 세상이 씻는다고 볼 수도 있겠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러자 스텔라가 빼꼼,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동그랗고 맑은 눈이 가득 그의 얼굴을 담아냈다. 갓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이른 아침 하늘에 아직 빛이 지워지지 않은 하얀 별이 떠 있다. 스텔라의 눈은 꼭 그런 빛깔이었다. 그리고, 노바는 그게 예쁘다고 생각했다. 새카만 죽음의 옷에 한기를 더하는 자신의 푸른 빛깔보다야.
“죽음이 널 좋아하는 게 무서워? 너는 내가 지키고 있는데.”
“그치만.”
“세상이 씻어버린 거라고 믿어.”
“…어?”
“그렇게 믿었잖아. 네가 믿고 싶은 대로 믿어.”
그러니까, 노바는 이제 스텔라의 세상에 손을 대지 않기로 했다. 계속 골치가 아팠는데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그렇게 정리가 되었다. 어찌 됐든 그의 일은 스텔라가 죽지 않게 지키는 것. 그 외의 애보기는 부탁 받은 것이었고, 말하자면 선심을 쓴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불필요한 일은 손을 떼기로 결정한 것이다.
스텔라를 감싸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에 잡혀 누구든 죽었다면 그것은 세상에 불필요하기에 세상이 씻어버린 것일 뿐, 스텔라의 잘못이 아니다. 스텔라가 생명이 있는 것에 애정을 주었으나 죽음의 그림자를 마셔버려 스텔라의 곁을 떠났다면, 그 역시 스텔라의 탓은 아니다. 운이 나빴고, 사고였고, 이미 지워진 것은 하늘이 흩뿌려주는 물방울에 녹아 묻힐 것이다. 혹시 그렇게 하면 이 아이가 죽음과 친해질까? 그것이 나중에는 성장한 아이의 힘이 되어버릴까? 그렇게 됨으로, 이 아이가 죽음을 원하는 이가 그 소원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될까. 충격을 받을까? 좋아할까? 그러나 죽음을 원하는 이가 있다면 스텔라의 세계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저가 먼저 그렇게 해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계약자의 소원이니까.
“네가 믿는 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니까.”
스텔라는, 그저 눈을 깜빡이며 사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두 눈이 새파란 불을 숨긴 보석 같다고 생각했다. 만지면 데이는 게 아니라, 얼어붙을 것 같은 불. 그건 참 예쁠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불이 아니라, 반짝반짝 예쁜 얼음이 되는 것이.
“…듣고 있는 거야?”
“응. 얼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하아?”
“그러면 반짝반짝 예쁠 테니까. 그러면, 어, 예뻐서 보러 온 사람이랑 친구도 하고.”
“그렇게 아무나하고 친구가 하고 싶어?”
“왜 아무나야? 친구가 되는 건 착한 사람하고야. 나쁜 사람은 세상이 씻어줄 거야. 아냐?”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대답을 고르기 전에, 스텔라는 누구와도 친해질 수 없는 몸이었고, 또 그런 걸 생각하기 전에, 그 말에 담긴 의미는 어린 인간 아이에게는 위험한 것이었다. 자신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죽을 거란 뜻이 아닌가. 그러나 바로잡아줄 사람은 없었다. 유일하게 곁을 지키고 있는 노바는 사신이었고, 조금 전까지 했던 생각의 결론으로만 봐도 인간의 관점에서는 망가진 사고방식이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맞아.”
이제는 이 작은 별에게 해가 된다면 씻어내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별의 이름을 가진 검은 날개이리라. 수호의 의무를 선택한 사신에게는 악의에 물든 영혼을 갈취하는 것 따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을 테니.
‘앞으로도 친구는 사귈 수 없을 거라고는 더 크면 말해줘야겠군.’
더 이상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지나가는 소나기였던 모양이다. 이제 커튼도 걷어도 될 테지만, 조금 더 놔두기로 했다. 죽음은 부정의 감정을 좋아한다. 그걸 떠올리고 나서야 노바는 왜 아이의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동심 가득한 거짓말을 했는지 이해했다. 비를 싫어하고, 비가 오면 불안해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죽음은 거기에 이끌려올 테니까.
“배고파.”
“그럼 이불에서 나와.”
“추워.”
“…….”
인간의 몸은 많이 불편하다고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노바는 눈을 꾹 감았다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아이를 뒤로 하고 부엌으로 나갔다. 차라리 사신으로 만들 수 있다면… 하는 것은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없는 케이스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만든 인물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했다. 한마디로, 이래저래 똑같은 것이었다. 노바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냄비에 남아 있는 스튜를 데우기 시작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그가 손을 떼기로 한 ‘불필요한 일’은 아니라는 정도였다. 인간은 살기 위해선 먹어야 하고, 결과적으로 스텔라가 죽지 않게 지키는 일에 포함되는 것이었으니까.
촤륵. 커튼을 걷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춥다고 하는 건 핑계였나. 알아도 이미 넘어가주었으니 소용없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나날들이 이어질까. 앞으로 얼마나 더 있으면 저 별빛을 제 손으로 꺼뜨릴 날이 올까. 노바는 이미 알고 있음에도 생각했다. 스텔라의 곁을 지키는 것은 일이었지만, 그는 이미 그의 소녀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망가진 장난감 상자 안에 푸른 별 조각을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