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서는 안되는 방
리베
꿈왕국과 잠자는 100명의 왕자님
레제 X 달리아
* ‘레제’ 달각 스토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성적인 암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트로이메아의 공주가 행방불명이 된 지 일주일째였다. 그녀의 집사인 나비와 그녀와 친분이 있던 왕자들은 사라진 공주를 찾기에 혈안이 되었지만, 단서가 될 만한 것은 하나도 찾지 못했다. 공주의 공백이 길어지자, 공주가 또다시 다른 세계로 가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기기도 했다.
의례의 나라 플루터.
플루터의 제 1 왕자인 레제는 나라 안에서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예의 바르고 훌륭한 왕자였다. 단정한 몸가짐과 상냥한 말투, 온화한 품성에 플루터의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를 칭찬했다. 항상 그가 진행하던 국의를 한 번, 그의 동생이 진행한 일이 있었다. 로이가 처음으로 국의를 주도하게 되었다고 알려주던 그의 얼굴은 퍽 대견스럽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정작 국의가 진행되던 중에 상황을 정리한 이는 로이가 아닌 레제였고, 당황한 로이가 레제를 들이받은 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다. 정말로, 단순한 사고였다고 그는 말했다.
단순한 사고였으면 그와 그의 동생 사이가 그렇게 틀어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그곳에는 누구도 열어서는 안 되는, 비밀의 방이 하나 생겼다. 레제가 왕궁 내 사람들에게 단단히 이르기를, 무슨 소리가 나든 무슨 일이 생기든 그 방을 열어보지도 말고 가까이 가지도 말라고 하였다. 청소도, 식사도 준비할 필요 없다, 집사와 하인들에게 그렇게 일러둔 그는 언제나 와 다를 바 없이 온화하게 웃는 낯이었기에 다른 이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 말은 즉, 그 방에 무엇이 있는지는 오직 레제만이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원래는 그러했다. 하지만 또 한 명, 레제의 동생인 로이가 열어서는 안 되는 그 방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
레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방을 찾아갔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잠시 주변을 살핀 그가 소리 없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로이는 이번 주에만 벌써 4번째 목격했다. 가볍게 차 한 잔 마실 시간, 혹은 식사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는 방에서 나왔다.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쳤던 그의 얼굴이 부드럽게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집사와 하인들의 말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제 형과의 사이가 확실하게 틀어진 이후로는 업무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그와 제대로 대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로이는 이에 관해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
한 번은 식사시간이 끝난 직후 자리에서 일어난 그를 붙들었으나, 그마저도 대화가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형님. 형님 최근 이상합니다.”
“그 방에 무엇이 있길래 그리 자주 찾아가십니까?”
“봤니?”
“예?”
“그 방, 봤느냐고 물었어.”
평소의 온화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로이를 비추었다. 제 형의 처음 보는 얼굴에 당황한 로이는 뭐라 입을 열지도 못하고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동생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레제는 의무적으로 짓는 것인 양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가볍게 로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닿는 다정한 손길임에도 로이는 그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괜한 관심 가지지 마라, 로이.”
그 방에 무엇이 있길래 그리도 욕심 가득한 눈을 하고 계십니까, 형님.
*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로이는 잠시 제 머릿속을 되짚어보았다. 제 앞에 있는 이 익숙한 여인은 누구고, 저는 어쩌다 이곳에 들어왔나. 국왕의 부름을 받은 레제가 자리를 비우는 것을 확인한 직후, 문 앞에 섰던 것까진 기억이 난다. 한동안은 아버지의 말씀에 발목이 묶여 있을 것을 알기에 로이는 눈앞에 다가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막상 문 앞에 서고 나서야, 문이 잠겨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문고리를 돌려 밀자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도 모두 차단한 듯 새카만 방 안에서 옅은 꽃향기와 온기가 불어왔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 발을 들이고 문을 닫자, 시야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불, 불을 켜는 스위치가 근처에 있을 텐데. 스위치를 찾으려 벽을 더듬는 사이 방 한쪽에서 고요하게 있던 누군가가 초에 불을 붙였다. 특유의 성냥 긁는 소리가 들리고 그 직후, 로이는 작은 불빛 아래에 누군가가 앉아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황스러워하며 입을 열지 못하는 로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양 갈래로 땋은 긴 까만 머리칼과 빛이 없는 분홍색 눈. 웃지도 울지도 않는 무감각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로이는 어렵게 입술을 들썩였다.
“…트로이메아의 공주님 아닙니까?”
“네, 맞아요.”
“어떻게…”
로이는 당혹스러워하는 얼굴로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트로이메아의 공주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문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인데, 그 소문의 주인공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걸까. 그는 믿기 힘든 사실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머리를 애써 굴리려 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달리아는 느긋한 몸짓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옷장으로 다가갔다. 커다란 옷장의 문을 열자, 가지각색의 드레스가 제 빛깔을 드러내었다. 당황스러워하는 로이의 팔을 잡아당긴 달리아는 그를 제 옷장의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옷장의 크기가 상당했던 탓에 사람 한 명 정도는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었다. 뜬금없이 화려한 드레스 속에 파묻히게 된 로이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옷장 밖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팔을 곱게 감싸 도로 옷장 안으로 밀어 넣은 달리아는 목소리를 낮춰 로이에게 속삭였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것인지는 알겠는데, 조금 있으면 레제가 올 거예요.”
“얌전히 있어요.”
제 할 말을 끝마친 그녀는 로이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곧바로 옷장의 문을 닫았다. 문 틈새로 옅은 불빛이 들어왔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제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옷장의 안쪽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로이는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문득 귀를 기울였다.
“달리아.”
제 형의 목소리였다. 분명 아버지의 호출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왜 벌써..? 혹여나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을 들킬까, 로이는 양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그럴 리 없지만, 저를 내려다보던 레제의 눈동자를 떠올린 로이는 제 숨소리가 바깥까지 들릴까 두려웠다. 혹시 이곳에 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걸까. 트로이메아의 공주님은 어떻게 형이 오는 것을 미리 눈치챘을까. 이 방에 들어온 걸 들키면 형님은 뭐라고 할까. 저 공주님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하나둘씩 떠오르던 의문이 로이의 머릿속을 가득 채울 때쯤, 바깥에서 들리는 부산스러운 소리에 힐끔, 옷장의 문틈으로 시선을 옮겼다.
침대 시트에 부딪는 옷자락과 흩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눈에 담은 로이는 황급히 눈을 돌렸다. 헉, 하는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 양손으로 제 입을 꾹 누른 채 로이는 몸을 웅크렸다. 제 입을 막고 있는 탓에 귓가로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두 사람의 목소리가 섞여 들어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달리아. 달리아. 이름을 부르는 레제의 목소리가 한참을 이어지고 어렴풋이 달리아의 목소리도 들려온 것 같았다.
한참을 웅크리고 있던 로이는 옷장 밖이 조용해졌음에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런 그를 의아하게 여긴 달리아가 먼저 옷장의 문을 열었다. 아까와 달리 풀어진 검은 머리가 조금 전까지 땋아있었음을 알려주듯 굵게 굽이치고 있었다. 달리아의 뒤로 옅은 촛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레제가, 여기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지 않던가요?”
“…”
조곤조곤 물어오는 달리아의 말에 로이는 울상을 지은 채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올려다본 그녀의 얼굴이 무섭도록 담담해 로이는 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제 형과 똑같은 눈동자였다.
“...밖에 사람들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네, 알고 있어요.”
“그럼 어째서 이런 곳에 계시는 거죠? 형님과는 대체…”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로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달리아는 조용히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대체 그걸 왜 묻느냐, 되묻는 것 같은 얼굴이 슬그머니 미소를 띤 것은 달리아가 옷장에서 로이를 꺼내 일으켜준 뒤였다.
“레제가 바랐으니까요.”
“역시 형님이 공주님을 잡아둔 겁니까?”
“어감이 이상하네요. 그렇게 말하니 레제가 저를 강제로 가둬놓고 있는 것 같아요.”
“…아닌가요?”
아니라고? 그리 되묻는 로이의 얼굴이 그녀에겐 꽤 우스웠기 때문이었을까. 처음으로 작게 소리를 내어 웃은 달리아는 로이의 팔을 잡아 조심스레 문 쪽으로 이끌었다. 작은 촛불 하나에 온전히 시야를 의지한 탓에 로이가 다른 곳에 부딪힐 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문 앞에 이르러서야 그의 팔을 놓아준 달리아는 노래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흘러내었다.
“레제가 바라는 대로, 레제의 말과 마음이 닿는 곳에 있기로 한 것뿐이에요.”
“…예?”
“앞으로는 여기 찾아오지 마세요. 레제가 알면 혼날지도 모르거든요.”
우려하는 말과 달리, 조금 신이 난 목소리에 로이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굴렸다. 웃고 있는 달리아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그는 제게 손을 흔들어주는 달리아를 마지막으로 내쫓기듯 방 밖으로 나왔다. 꽤 오랜 시간 안에 있었는지, 복도의 창문 너머로 해가 지는 것이 보였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던 로이는 제 뒤에 닫혀 있는 문을 한 번 돌아보곤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 차갑게 가라앉은 레제의 얼굴도 담담하게 웃는 달리아의 얼굴도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으므로, 당장 로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