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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물고기

은비

 

앙상블 스타즈!

신카이 카나타 X 이츠키 비비

여름은 무더웠다. 빗줄기가 거세게 내리기도 했고, 태풍을 동반한 폭풍우가 쏟아지기도 했다. 제법 차고 무거운 바람이 그치지 않는 나날이 계속되었지만 여름 앞의 무덥다는 수식어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무덥고 축축한 공기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짓눌렀다. 비비는 옅은 한숨을 내뱉고 손 부채질을 하며 주변 공기를 환기시켰다.

풍성한 머리카락이 허리를 덮는 비비는 이런 여름이 달갑지 않았다. 뒷목은 늘 땀으로 젖어 들어갔고 등허리는 딱 달라붙는 셔츠 탓에 부자유스러웠다. 그나마 앞머리를 내지 않은 게 다행으로 생각될 만큼 비비는 자주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치고 아무 무늬 없는 연한 하늘색 손수건으로 제 손을 닦아내었다. 손수건의 끝자락엔 끈적끈적한 스티커 자국이 남아있었다.

자세히 보고 보아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지워진 그 자국은 본래 무엇의 자리였을까. 비비는 아무렇게나 손수건을 둘둘 말아 제 싸구려 천 가방에 집어넣었다.

본래 가지고 다니던 가방의 손잡이가 떨어져 지하철 어귀에서 가격표도 안 보고 산 아이보리색 가방은 주변의 손때가 타 보풀이 일어날 대로 일어나있었다.

말끔하고 매끄러운 비비의 외모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 이질적인 무언가. 천 가방과 스티커 자국이 오버 랩 되었다. 있어야 할 곳에 없는 무언가와 없어도 될 무언가. 비비는 머리가 아파왔다. 스티커 자국은 평범하고 단순한 물고기 모양이었다.

비비는 어렸을 적부터 여름을 싫어했다. 여름이 싫어, 입을 떼면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기 때문에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여름이 싫어. 열도 붙지 않던 나이의 비비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름이 싫고 무뎌지지 않는 게 제 나이와 함께 자랐다. 어깨에 닿지 않고 찰랑거렸던 머리칼은 어느새 허리를 덮을 정도로 길었다. 그 시간 속 여름은 여전히 끔찍했다.

 

* * *

비비, 누군가 제 이름을 조용히 부르는 것만 같았다. 여름바람은 비비에게 항상 무익했다. 해로울 건 없어도 이익도 없는 바람. 그게 조금 바뀔 지도 모를까 했던 적이 있다.

푸른 머리카락 아래 영롱한 연한 녹색을 빛내던 물의 아이. 한여름의 마지막 날 태어난 심해. 신카이 카나타. 잔잔한 파도 소리가 들리는 날이 있었다. 아마 카나타의 낮게 울리는 심장소리를 들었던 날이었던 것 같다.

“비비.”

어디선가 제 이름이 울리는 것 같았다. 파도 소리만치 고요한 시간을 깨는 한 줄기의 금 같은 순간.

“비비.”

비비는 뒤를 돌아 소리의 근원을 마주하는 게 두려웠다. 끈적해진 물고기 자국과 파도를 닮은 물빛 심장소리가 눈에 선했다.

“비비, 그렇게 「도망」가면 해결될 것 같나요?”

“……. 카나타.”

“비비.”

언제부터였어? 그 망할 널 닮아 사랑스러운 스티커도 뗀 지 오래인데. 그걸 붙였을 때부터였어? 넌 언제부터 날 쫓았어? 아니, 내게 눈을 뗀 적은 있니. 없겠지. 그랬다면 내가 먼저 숨이 멎었을 테니까.

“비비, 「저」는 눈을 뜨고 깜빡이지도 못하는 채 물 속에 떠 있는 게 고작인 「물고기」일까요?”

비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 제 뒤를 쫓았는지 모를 카나타는 부러 인기척을 낸 게 틀림없었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이 아스팔트가 아니라 축축한 물 위 같은 착각이 스몄다.

“그런 「물고기」여도 사랑하는 건 「당신」이었죠?”

새파랗게 질려서 자신도, 다른 물고기들도, 물풀도 피하는 물고기여도 끌어당겨 안아주는 건 새까만 색을 가진 당신이었잖아요. 카나타의 미소는 서늘했다. 카나타의 입꼬리가 포물선을 그리는 건 일상이었는데 그게 그토록 비일상으로 느껴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사랑하는 「비비」.”

카나타는 손뼉을 한 번 쳤다. 베시시 웃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파란 물고기, 푸른 물빛을 닮은 물의 아이에게 부르는 제가 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사랑을 담은 찬사였다.

너는 물의 아이, 물에서 나고 자라 누구에게든 물처럼 당연하게 사랑 받아야 할 아이. 그런 네게 내가 붙여줄 수 있는 말은 파란 물고기였다. 맑은 물 속에 손을 넣으면 감겨오는 물길마냥 저를 사랑으로 간질인 물고기를 똑 닮은 카나타가 짓는 웃음은, 서늘했다.

“「저」를 사랑했고 푸르게 만들어준 사람이잖아요? 비비는. 파란 물고기 같은 건 「불길」하고, 「불협화음」보다 다를 게 없잖아요. 쓸 데 없이 자아만 강하다고.”

카나타가 뱉는 말은 모두 카나타를 찌르는 비난의 말이었다. 괴물, 기분 나빠. 이상해. 불협화음, 불길해. 눈을 질끈 감았다가 초연한 얼굴로 제 이름을 부르며 애써 웃는 카나타가 선했다. 비비는 어떤 얼굴을 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옛날 일이야. 파란 물고기랑 언제까지고 같이 바닷 속에 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나는 숨이 막혀. 산소를 마시지 않으면 죽어버려. 너를 사랑했지만, 너를 사랑하지만 모두 옛 일이야. 더 이상 너와 같이 있다간, 있다간, 있다간….”

“「비비」는 알고 있잖아요. 누구의 손도 닿지 않고, 누구도 손에 닿는 걸 두려워한 새까만 「마녀」는 「비비」를 칭하는 말이니까. 외로운 건 「당신」이었죠? 외로워서 타 버리는 당신과 저는, 떨어질 수 없는데.”

우리는 분명 동화였다. 새까만 숲에 사는 외로운 마녀와 불협화음의 상징인 파란 물고기. 우리 둘의 만남은 쓸쓸함과 불길함의 결합이었고, 누군가에겐 불길한 전승처럼 여겨졌다. 그런 우리였기에 우린 사랑을 했다. 처참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 ……. 깊고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랑을 했다.

카나타와 비비의 사랑은 분명 동화였다. 다른 이들에게 기피 당하고 상처받은 둘이 만나 무력하고 갈 길 없는 사랑을 서로에게 퍼붓는 파도와 폭풍 같은 사랑을 하는, 굳이 장르를 붙이자면 그것은 공포나 전승 따위가 아니라 멜로드라마였다. 새까만 마녀와 파란 물고기는 범인들의 가치를 아우르는 사랑을 했다. 그것이 깨진 건 동화가 깨진 것과 다름 없었다.

작가가 없는 동화였기에, 동화는 갈 길 없이 치닫을 뿐이었다. 그걸 무어라 불러야 할까. 잔혹동화 쯤으로 붙이면 좋을 제목이었을까. 마녀는 마술도 쓰지 않은 채 사라졌다. 기척도 지우지 않았고, 기억도 지우지 않았다. 파란 물고기는 눈물도 나지 않았더랬다.

여름이 싫다던 그 마녀는, 비비는 결국 푸른 저마저도 떨쳐내고 겨울로, 차디 찬 현실로 돌아섰다. 혼자 남은 카나타는 평소와 같이 일상적으로 웃었다. 그게 비비의 길이라면 기꺼이 범람해 비비를 데려올 것이 카나타의 길이었다.

* * *

“사랑하는 「비비」.”

“「사랑」하는 비비.”

“사랑하니까요, 「여전히」요.”

비비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폭풍우와 해일처럼 범람해오는 카나타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울었을까.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마, 내일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시야를 채울 건 덕지덕지 붙어있던 스티커의 자국 위에 덧대어질 파란 물고기 자수일 터였다.

동화는 다시 시작되었다. 마녀는 더 이상 마술도 부릴 수 없고, 도망갈 수도 없다. 파란 물고기가 물 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게 하늘을 채우는 것만 같았다. 마치 금붕어나 빨간 잉어 따위가 이상하다는 듯 자유롭게 헤엄치는 파란 물고기는, 천천히 포물선을 그리며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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