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무지개
RISEM
포켓몬스터
플라타느 X 나리엔
안녕하세요, 리엔 씨. 갑자기 웬 편지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말들을 적어볼까 합니다. 두서없는 말들이지만 이렇게 손으로 써 내려가면 조금은 정리되지 않을까요?
우선 메리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종종 생각이 나는지 밤에 메에메에 하고 울긴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한카리아스나 다른 포켓몬들이 많이 위로해주는 모양이에요. 지금은 줄곧 뛰어놀기도 합니다.
알랭과 마농, 다른 연구원들도 괜찮습니다. 한동안 허전해하고 낯설었지만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를 마친 모양이에요. 본인들도 힘들 텐데 저까지 신경 쓰느냐 고생이 많았지요. 그들에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보내고 멈출 거라 생각했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갑니다. 벌써 당신을 떠나보냈던 계절이 다시 돌아왔네요. 그 해에는 포근하고 맑은 여름이었죠. 햇빛도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내려왔고, 땀을 식혀줄 선선한 바람도 곧잘 불었지요. 이번 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립니다. 아니, 작년이 유난히 비가 내리지 않았던 걸까요.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립니다. 빗줄기가 굵은 것을 보니 잠시 왔다 가는 모양이네요. 직전까지 햇빛이 강했으니 이번 비가 그치면 무지개가 뜰까요?
리엔 씨를 만나고, 인연이 이어져 연인이 되고 많은 시간이 흘렀지요. 그 사이동안 좋았던 일도, 다퉜던 일도, 처음엔 특별했지만 점점 익숙해지고 사소해진 일도, 잊지 못할 특별한 일도 많았지요. 당신과 둘이서 쌓아올렸던 추억 중에서 가장 떠오르는 것은 리엔 씨와 무지개를 보던 그 날 일입니다.
같이 병원을 가던 길이었죠. 날이 좋다며 걸어가기로 했고, 우리는 얘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었어요. 언제까지고 이렇게 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 때 걸음을 멈춘 당신이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죠. 무지개가 떴다고. 굉장히 뚜렷한 무지개였어요. 근래 들어 본 무지개 중에 가장 크고 뚜렷한 무지개였어요. 그렇다고 기억하고 있지요.
이유는 알 수 없어요. 당신과 맞춰가던 걸음걸이도, 당신의 손짓도, 살짝 들뜬 목소리도, 햇빛도, 유난히 새파랬던 하늘도, 전부 또렷이 기억나는데 그 무지개만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떠올리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색을 잃다 못해 새까매지지요.
그 날 저녁에 당신과 나눴던 얘기 때문일까요.
검사 결과를 전해들은 당신은 침울해졌지요. 연구원들이 신경 쓰게 만들기 싫다고 했지만 결과를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은 병원을 나설 때부터 연구소에 돌아와서까지 한동안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죠. 지금 생각해보면, 당신은 그 때부터 이미 마음을 정리하는 중이었던 것 같네요.
오랜 침묵 끝에 제게 꺼낸 말은 무지개에 대한 말이었죠. 포켓몬은 죽으면 무지개다리를 건넌데요, 박사님. 그 후에 나눈 대화는 한 마디 한 마디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무지개는, 무지개다리는 7가지 색으로 알록달록하지만 대부분 죽음은 무채색, 특히 검정으로 표현된다고 말을 이었어요. 그리고 검정은 미련이 질척질척 남는 색 같다고, 안녕을 빌기보단 떠나지 말라고 떼쓰는 것 같다고 덧붙였어요.
제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으니 검정은 깊고 깊은 어둠이고, 끝을 알 수 없는 늪 같다고 답했죠. 정말로 지금 맞이하는 것이 인생의 끝이고, 한 번 빠지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고, 다음이 없다고 못 박는 느낌이라고. 그러니, 그리 좋지 못한 것이니, 마냥 떠날 때 좋게 헤어지지 않고 못 가게 막는 것 같다고.
만약에 고를 수 있다면 검정보단 무지개가 좋겠어요. 당신은 꽤나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죠. 무지개는 영원한 끝을 선고하기 보단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곳으로 떠나는 길을 밝게 밝혀주는 것 같다고. 당신은 이왕이면 검은색 다리보단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싶다고 말했죠.
혹시 무지개다리를 건너다보면 어렸을 때 떠나보냈던 포켓몬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요? 당신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웃으며 농담을 건넸죠. 저는 마냥 웃을 수 없었지만요.
그 말을 하는 당신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마지막을 앞둔 사람은 어떤 심정일지, 당신은 아주 먼 훗날에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안일했던 탓이었을까요. 너무 희망적이었을까요. 마음의 준비를 끝내기 전에 당신은 떠났지요.
당신의 흔적을 정리하면서 성호 씨와도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마지막 날 당신과 있었던 일, 나눈 대화, 감정까지. 그러다 리엔 씨가 해준 얘기가 나왔죠. 무지개 이야기요. 성호 씨는 가만히 듣다가 ‘내 동생답다’며 웃었어요. 그리곤 리엔 씨가 해준 얘기처럼, 완전한 끝을 슬퍼해주기보단 또 다른 삶을 사리라 빌어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죠. 오빠로서, 연인으로서 안녕을 빌어주는 것이 낫겠다고.
그 대화 이후 홀로 무지개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습니다. 아니, 사실 그 전부터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하고 자리 잡지 않은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언젠간 당신에게 해주겠노라 생각했지만 때를 놓친 걸지도 모르지요. 결국 이 편지를 쓰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무지개는 7색깔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7개의 색이 모이면 결국 까맣고 하얘지지요. 결국 죽음을 검정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검은 옷을 입고 마지막을 함께하는 이들도, 누군가를 인도하는 7빛깔 무지개도 표현이 다를 뿐 모두 떠나가는 사람이 좋은 곳에 가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에 대한 미련을 전부 떨쳐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함께 보았던 무지개가 7빛깔로 빛나든, 검정색이든 당신의 끝은 좋은 곳에 다다를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당신이 행복했길, 앞으로도 행복하길 바라면서, 닿지 않을 이 편지를 보냅니다.
- 플라타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