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려요. 하늘에서 비가 내려요
이비
Free!
나나세 하루카 X 이비 유즈나
※본 글은 자해와 입시 스트레스와 관련된 내용이 직•간접적으로 묘사 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불편함을 느끼시는 분은 읽는 것을 지양하시기를 권장합니다.
더불어, 위에 명시된 어떤 것도 미화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혹여 글의 내용에서 불편함을 느끼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본 글은 “Free!-Eternal Summer-”로부터 1년이 지났다는 설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올해의 여름은 무더울 것이라고 했다. 그 뉴스가 나오고 며칠 지나지 않아 장마가 시작되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다툰 뒤였다. 그때 너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작년의 너를 떠오르게 해서 난 너에게 부탁이니 그 표정만큼은 짓지 말아 달라고 부탁할 뻔했다. 그만큼 난, 네가 괴로워하는 표정을 보는 것이 싫었다.
W. 이비
아침 일찍 눈을 뜬 유즈나는 눈가가 따갑게 아파져 오는 것을 느꼈다. 창 너머로 쏟아지는 빗소리는 창밖을 보지 않아도 비가 오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장마였다는 것이 새삼 다가왔다. 오랜만에 혼자서 맞이하는 토요일의 아침이었다. 평소였다면 하루카의 목소리를 들으며 침대에서 나오고 있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머리는 아프게 울렸고 눈가는 뻑뻑하게 아파져 왔다. 전날 주고받았던 대화가 귓가에서 생생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내 일이잖아? 하루가 신경 쓰지 마. 다른 사람이 내 일에 관여하는 거 너무 싫으니까.”
바보. 게다가 최악. 지난밤, 자신이 내뱉은 말을 떠올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신을 걱정해 준 사람에게 한 말이 겨우 그따위의 말이라니. 스트레스에 그만 자신의 몸에 상처를 만든 것을 보면서 남자친구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얼마나 속상했을까. 평소에는 어떤 장난에도 무디기만 했던 사람이었지만 어제는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었다. 그만큼 놀랐다는 거겠지. 그 생각을 하며 유즈나가 힘겹게 침대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왼쪽 손목이 시큰거리고 아팠다. 당연했다. 평범한 샤프로 피가 날 때까지 미친 듯이 찔렀는데 아프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단단하게 감겨 있는 붕대를 가만 바라보다가 그 위를 손으로 쓸었다. 이 붕대를 감아주던 넌 얼마나 괴로웠을지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침대 근처에 자리 잡은 책상 위에는 아직도 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는 옷장 아래에는 피가 묻어있는 샤프가 어지럽게 구르고 있었다. 서둘러 떨어져 있는 샤프를 주워들고 책상 위의 붉은 자국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분명 모든 것이 완벽할 터였다. 오랜만의 데이트라 조금 들떠 있었고 설렘도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시험 기간이지만 오늘 하루 쉰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다음 순간, 걸려온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아무 문제가 없을지도 몰랐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 던져두었던 핸드폰이 전화가 걸려왔음을 알렸다. 핸드폰 액정은 그 전화가 자신의 엄마로부터 걸려온 것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뿐이었고, 아무런 의심 없이 전화를 받은 것도 그런 문맥에서였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아, 공부하고 있을 텐데 방해해서 미안해.
만약, 그 말을 들은 순간, 바쁘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더라면 어땠을까. 괜찮았을까.
전화를 끊은 후, 유즈나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화장실로 달려가 아침에 먹었던 모든 것들을 게워내는 것이었다. 속이 울렁거렸고, 제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었다.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억지로 공부하며, 부모님의 기대를 부담으로 안고 공부하던 감각은 이제는 상관없을 감각이라고 생각했는데. 한참 동안 속에 담긴 모든 것을 게워내는 동안, 유즈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멀쩡하게 버티고 서있기 힘들 정도였다. 아직도 그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도는 것 같았다. 어지러웠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고 유즈나는 겨우 손을 움직여 물을 틀었다. 세면대에 조금씩 차오르는 물을 보니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조금 있으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떨리는 손이 진정되지 않아 움직일 수 없었다. 물컹거리고 기분 나쁜 감각이 온몸을 덮었다. 아무리 숨을 고르며 진정하려 해도 쉽게 되지 않았다. 아까 전의 그 말들이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딸이 게이오 대학(慶應義塾大學)에 다닌다고 하니까 모두 대단하다고 하는 거 있지. 그래서 말인데, 유즈나 곧 시험이라고 했지? 결과 기대하고 있을게.”
난 언제까지고 엄마의 인형이 아니란 말이야. 좋은 학교에만 진학하면 이제 신경 안 쓴다면서. 난 엄마가 원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거야. 그런 말들이 솟아오르는 듯했지만 전부 삼켰다. 다시 예전처럼 불량품이라든가 실패작이라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죽을 것만 같았다. 가능하다면 죽고 싶었다. 말 한마디가 이런 큰 힘이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하루카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쯤이었다. 가능하면 혼자 있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하루카의 목소리를 들으면 지금의 기분이 나아질 것만 같았다. 전화 너머에서 늘 듣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아, 유즈나, 미안, 조금 늦을 것 같아서.”
“하루, 고등어 때문인 건 아니지?”
“…아니야.”
“농담이야, 농담~! 괜찮아, 나도 늦을 것 같아.”
그 뒤로 몇 번의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전화를 끝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이 다시 한 번 진동했다. 액정 위에는 짧은 길이의 라인이 와 있었고, 느릿하게 문장을 훑던 유즈나가 핸드폰을 내던졌다. 던져진 핸드폰은 잠시 바닥을 구르다가 서랍장에 부딪히며 움직이기를 멈추었다. 핸드폰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즈나가 시선이 책상 위에 있는 연한 하늘색의 샤프로 향했다. 그뿐이었고 한순간이었다. 그 샤프를 들어 최대한 강한 힘으로 내리찍었다.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지만 피는 흐르지 않았다. 약간의 상처가 생겼을 뿐이었다. 그래서 한 번 더 찍었다. 피가 날 때까지, 그 행동을 반복했다.
여리고 가는 손목이었어도 생명력은 질겼는지 피가 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흰 손목에 겨우 붉은 피가 맺혔다. 그 뒤로도 손목을 찌르고 그어대는 행동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조금이지만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유즈나의 행동은 그제야 멈추었다. 무척 단순한 행동이었지만 숨은 거칠어져 있었다. 어쩌면 그런 타이밍을 노린 것일까. 조금 전 봤던 짧은 문장이 머릿속을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
[분명 잘 할 거야. 이제 더는 중학생 때처럼 실패작이 아니잖니]
문자 내용이 떠오르자 정말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즈나는 다시 화장실로 달려가서 이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속을 몇 번이고 게워내었다. 도망치고 싶었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이제까지 해 온 거면 충분하지 않나? 얼마나 더 힘들어야 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다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깊게 생각해도 자신에게 좋을 것은 없었다. 애초에 찾고 싶다고 해서 답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치료도 하지 않은 손목으로 집을 나섰다. 그쯤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우산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하루카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손목의 상처는 바로 들켰다. 한참 동안 무슨 일이냐며 언성을 높이던 하루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자 평소처럼 차분하게-하지만 목소리는 분명 떨리고 있었다. 전혀 차분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간결하게 말을 이었다. 약국 찾아보고 올게, 기다려. 그 말과 함께 가지고 있던 우산을 손에 건넨 하루카는 짧은 시간에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몇 분 뒤 돌아온 하루카는 화가 난 듯 입을 가만히 다물고 있었다. 묵묵히 상처에 약을 바르고 꼼꼼하게 붕대를 감아주었고 말은 하지 않았다. 긴 시간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하루카가 침묵의 끝에서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는 걱정과 염려였다. 괜찮은 거야? 언제나처럼 덤덤한 말투에 녹아든 걱정은 분명 눈물이 날 만큼 따뜻했으나 유즈나는 저도 모르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그 말을 해서는 안 되었는데.
“괜찮아, 이제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그 말을 들은 순간 하루카의 표정은…어째서인지 유즈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뒤로 몇 번의 말다툼이 오갔다. 직접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하루카는 지금의 상황에 당황한 것 같았고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하는 것 같았다. 평소처럼 다정함이 섞인 목소리로 차분히 이름을 불러주었고, 자신에게 향한 그 눈빛마저도 차가운 듯 했지만, 속에는 따뜻함이 그득하게 차 있었다. 그 따뜻함에 유즈나는 질식할 것 같아 자신의 손을 잡은 손을 크게 뿌리쳤다.
“그러니까 이제 됐다고 했잖아! 그만해!”
정적이 이어졌다. 숨 막힐 것 같은 정적의 끝에서 유즈나는 들고 있던 우산을 하루카에게 되돌려 주었다. 굵어져 있는 빗줄기에 머리가 아프게 진동하는 것 같았다. 건넸던 우산이 다시 자신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것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며 뒷걸음질 쳤다. 우산의 아래에서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고,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표정에 유즈나는 작년의 일이 떠올랐고, 자신이 잘못했으니 그 표정만큼은 짓지 말아 달라는 말을 애써 삼키며 말을 이었다.
“내 일이잖아? 하루가 신경 쓰지 마. 다른 사람이 내 일에 관여하는 거 너무 싫으니까.”
그게 전날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그 상태로 비를 맞으며 집까지 걸어왔고, 몸에 묻은 물기만 닦은 채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마지막 순간에 들었던 말이 어째서 자신을 향한 비난이 아닌 걱정이었던 건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괜한 기억을 떠올린 것 같아 피곤함이 몰려왔다. 더는 어떤 행동을 하기 힘들었기에 책상을 닦던 손길을 멈추었다.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무력감에 두 무릎을 모아 얼굴을 묻었다. 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지? 그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다.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조용한 방 안을 울리는 것은 굵어진 빗소리뿐 이었고 비가 그칠 때쯤에는 질문의 정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있었고, 그칠 때까지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