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파란우산의 요정
이비
아이들의 권 선생님
차시루 X 이비
※본 글은 가정폭력이 직•간접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불편함을 느끼시는 분은 읽는 것을 지양하시기를 권장합니다.
더불어, 본 글에서 가정폭력을 미화하려는 의도는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혹여 글의 내용에서 불편함을 느끼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본 글은 원작 “아이들의 권 선생님”의 이야기와 다르게 흘러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W. 이비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작고 여린 아이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11살의 어린 나이로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흐릿해져 가는 시선에 들어찬 것은 오늘 하루 종일 소중하게 지니고 있던 자신의 선생님-물론, 아이는 며칠 전에 자신이 다니는 학교로 갑작스럽게 오게 된 낯선 남자를 선생님이라고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 이 상황에서 아이가 생각해 낼 수 있으면서 낯선 사람을 가장 완벽하게 정의할 수 있는 단어는 선생님 이외에는 없었다. 그뿐이었다.-의 연락처였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소주병 조각이 반짝거렸다. 날카로운 모서리에 긁힌 손등은 따가웠지만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검은 옷소매 안에 위치한 손목은 푸른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이 정도는 일상이었다. 아프지 않았다.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몰랐다. 이제 이 정도의 아픔은 무디게 다가오고는 했다.
귀 옆으로 녹색 빛의 병이 수직 낙하했다. 맑은 유리병은 귀를 파고드는 소음을 일으키며 산산조각으로 깨졌고, 주변으로 흩어지며 작게 빛났다. 깨진 몇몇 조각은 아이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붉은 선혈(鮮血)이 뺨을 타고 흘렀지만 아이는 그저 손등으로 한 번 훑어내기만 했다. 아프다고 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더 맞거나 오늘은 여기서 멈추거나. 둘 중 하나였다. 집 안이 조용한 것을 보니 또다시 술을 사러 나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였다. 아이는 죽을 것같이 아픈 몸을 일으켰다. 손에 소중하게 지니고 있던 연락처는 대충 접어 바지 주머니 안에 넣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발치에 딱딱한 나무 목각이 걸렸다. 부러진 곳을 이어둔 청색의 테이프가 괜스레 보기 싫어 조심히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밖으로 나오니 아직 저물지 않은 햇빛이 아이를 맞이했다. 푸른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더 지나 땅거미가 어둡게 내려앉을 때까지. 적어도 그때까지만 어디선가 몸을 피하고 싶었다. 평소라면 조용히 받아내었을 그 행동과 말이 오늘따라 버거웠다. 날이 어두워지고 나면 그 사람-아이가 칭하는 이 사람은 아이에게는 아버지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으나, 아이는 그 사람을 아버지 혹은 아빠라고 부르기 힘들었다. 어쩌면 당연하였다.-도 자신의 모습에 지쳐 잠이 들었을 테니 그때 살짝 들어가 잠을 청하면 될 것이었다. 살짝 뒤를 돌아 자신이 빠져나온 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최대한 빨리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어머, 시루야. 어디 가니? 자신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아이-이후부터 아이의 이름으로 서술함.-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옆집에 사는 중년 여성-시루는 이 여성을 아줌마라 부르고는 했다.-이였다. 몇 번 길을 오가며-주로 등교나 하교를 할 때였다.- 마주친 적이 있는지라 얼굴을 아예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전에 몇 번 정말로 죽을 뻔했던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기도 했다. 어디를 간다고 해야 안전할까.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시루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디 좀…. 심부름 가예.”
대충 대답을 하고 넘기려다가 심부름을 간다고 말한 것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기 위함이었다. 혹시라도 이상하게 여긴다면 나중에 안 좋은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그렇구나, 시루는 착한 아이네. 비가 온다고 하던데 우산은 챙겼니? 그 말에 시루의 시선이 느릿하게 하늘로 향했다. 가만 보니 땅거미 지고 있는 하늘에 드문드문 어두운 먹구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가서 우산을 챙겨 와야 하는가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필요 없을 것 같아 작게 대답했다. …예. 그 대답을 따라 자신을 훑는 시선이 느껴졌다. 비어 있는 손을 보고 한 번, 볼에 난 상처와 핏자국을 보고 두 번.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평소에도 자주 있는 일인지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는지 늦기 전에 어서 가보라는 목소리만 들었다. 그 목소리에 그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인 시루가 급히 걸음을 옮겼다.
특별히 가겠다고 결정한 곳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발걸음이 향하는 대로 걸음을 옮기니 학교였고, 운동장을 두 바퀴 정도 돈 시루는 더는 할 것이 없어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 작은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차가운 비가 볼에 닿아 흘러내렸고 시루는 그제야 비가 내리고 있음을 느릿하게 깨달았다. 빗줄기는 조금씩 굵어졌지만, 집으로 일찍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비를 맞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어디에 가야 하나. 작은 물음이 시루의 머릿속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답은 찾을 수 없었다. 그 무렵이었다.
“시루야!”
자신과 조금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굵어진 빗줄기 사이에서 소리의 근원지를 찾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어렵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시루의 눈에 파란색의 우산이 시야에 들어찼고, 우산 아래로 하늘거리는 검은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위치였다. 누나야가 여긴…. 그 말보다 조금 더 빨리, 소녀의 목소리가 시루의 귓가를 울렸다.
“왜 여기 있어. 한참 찾았잖아.”
안도(安堵)와 울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권 쌤이 아까 전화하셔서 시루 집에 가보라고 해서 갔는데 시루가 없어서…. 그래서 산이 집에도 가보고 서리에게 전화도 해보고 그랬는데, 없어서, 다시 시루 집에 갔는데, 근데, 경찰차가 와 있어서 그래서 계속 찾아다녔는데도 없어서…. 떨리는 목소리가 공중에서 한참 방황했다. 평소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는 목소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던 소녀가 걸음을 옮겨 시루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제 한 걸음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소녀와 시루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던 소녀가 무릎을 굽혔다. 눈높이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크고 넓은 파란 우산이 시루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일순간, 귓가를 따갑게 울리던 빗소리가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내 한참 찾아다녔나.”
“….”
대답은 없었다. 눈물을 꾹 참은 입가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느릿하게 그린 미소가 어딘가 눈물에 얼룩져 있었다. 눈물에 그득히 젖은 검은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았다. 가까이서 보니 급하게 뛰어다닌 듯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었다. 한참 동안 시루를 바라보던 소녀가 손을 뻗어 붉은 상처가 난 얼굴을 매만졌다. 자상한 손길에도 상처는 따가웠지만, 시루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파란 우산에 빗방울이 떨어지며 톡톡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루야. 소녀가 젖은 목소리로 시루의 이름을 부른 것은, 빗줄기가 꽤 굵어졌을 때였다. 한 우산 속이 아니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빗줄기는 굵어 있었고, 우산 위로 비가 떨어지는 소리도 어지러울 정도로 컸으나 소녀는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어린아이에게 자장가를 읊어주듯 작게 목소리를 내었다. 그 부름에 시루가 대답한 것은, 자신의 이름이 한 번 더 불렸을 때였다. 시루야. 그 목소리에 시루가 가만히 자신의 앞에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고 소녀는 힘없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시루의 시선이 소녀를 따라갔다. 파란 우산 아래에서 검은 머릿결이 비바람에 춤을 췄다.
“우리 슬슬 돌아갈까.”
“내 집으로는 안 갈 낀데.”
“우리 집으로 가자.”
소녀의 말에 시루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누나 집으로? 그리 되묻는 목소리에 소녀가 느긋하게 웃음 지었다. 응, 우리 집으로. 가서 상처부터 치료하자. 많이 아팠겠다.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울음에 젖어 떨리고 있었다. 가만히, 아주 가만히 숨을 삼킨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한참 동안 소녀의 말을 되짚던 시루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자신의 손목에 위치한 푸른 자국으로 시선이 갔다. 이제는 무뎌졌다고 생각한 이 상처가, 자신의 앞에서 따스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으로 인해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소녀가 아픈 상처를 건드렸다거나 다른 상처를 냈기 때문이 아니었다. 비 오는 날,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급하게 온 동네를 뛰어다녔을 자상함과 몸에 새겨진 낙인과도 같은 이 상처를 못 본 척하지 않는 따뜻함이 그동안 익숙하기만 했던 상처가 사실은 무척 아프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想起)시켰을 뿐이었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이제까지 자신의 상처와 자신에 대한 것들을-여기에는 시루의 아버지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외면해 온 다른 사람들은 이 상처가 얼마나 아픈 것인지 모르게 될 정도로 자신을 무디게 만들었었다. 무관심과 외면 속에서 시루는 그렇게 자랐다. 자신의 상처에도 무딘, 그저 어른스럽기만 한 아이로. 하지만 이 사람이라면 그대로 봐주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아픔은 시루에게 있어 긍정적인 의미였다. 자신에게 내밀고 있는 저 손을 그대로 마주 잡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적어도 저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가자, 누나야 집으로.”
그리 말하며 시루가 손을 잡았다. 오랜 시간 비가 내리는 밖에 있었음에도 맞잡은 손은 따뜻했다. 소녀의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옮기는 동안 빗줄기는 점점 약해졌고, 햇빛은 파란 우산과 두 사람을 따스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밝은 햇빛이 모습을 완전히 드러낼 때쯤에야 주머니 안에 넣어 두었던 연락처가 떠올랐지만, 시루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내일 학교에서 보게 된다면 고맙다고 할지 아니면 앞으로는 쌤이라고 부를지 그 생각만을 할 뿐이었다. 연락처를 버리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게 되었을 때 쓰지도 않을 터였다.
앞으로 비가 내리게 되더라도, 그 비를 피할 수 있는 따뜻한 장소를 찾았으니까. 그러니까 제 곁에 있는 사람의 따뜻함으로도 충분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