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밑에서 들리는 아름다운 소리
쿠사
밴드하자!
코가네이 신 X 아오야마 카논
00
소문을 믿느냐는 질문에 내 대답은 늘 부정적이었다.
"아니, 이번엔 진짜라니까?"
"네가 진짜라고 했던 것만 몇 번째인 줄 알아? 내가 하루에 잡아오는 생선보다 많을 걸."
"그 정도는 아니지."
닦달하듯 쫑알쫑알 따라붙는 목소리에 나는 손사래를 쳤다. 손날에 닿아 흐트러지는 목소리가 성이 잔뜩 나 있었다. 그도 그럴게, 레이는 팔랑 귀여서 남의 말을 곧잘 믿었다. 제 아무리 신빙성 없는 정보라 할지라도 말이다.
수평선 너머로 이제야 막 해가 고개를 내미는 이른 시각, 레이는 아침부터 내 뒤를 졸졸 밟아왔다. 고기잡이라 하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싫다고 질색을 하던 녀석이.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자신을 배에 태워 달라고 보채 오길래 그러라고 했더니, 또 시덥지 않은 이야기다. 진짜 내 말 좀 믿어 보라니까? 지치지도 않는지 쉴 틈 없이 몰아붙이는 목소리에 결국 팔짱을 끼며 레이를 건너다본다. 맑게 갠 하늘을 담은 눈동자 속에 비추어진 나는 미간을 잔뜩 구긴 채였다.
"레이, 적당히 좀 해. 저번에도 옆집 아저씨가 마늘만 먹어서 대머리가 되었다는 소문만 믿고 집에 있던 마늘을 몽땅 버렸잖아. 결국 마늘이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래, 문제는 그 아저씨의 유전자였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응? 딱 한 번만 태워주라. 레이는 양 손바닥을 탁, 소리 나게 모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나는 그 노란 정수리를 보며 무겁게 한숨을 토해낸다. 답답함에 나오는, 어딘가 짓눌린 듯 뭉개진 한숨이었다. 더 씨름 해봤자 레이의 고집은 꺽이지 않을 것이다.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모든 시간을 공유해온 나로서는 알 수 있었다. 레이는 고집이 세고, 한 번 무언가에 꽂히면 반드시 그 일을 해내야만 했다. 그 모습이 한결같아 좋아 보이긴 하지만, 가끔은 골이 다 아프다. 안 데려간다고 하면 또 난리치겠지. 차라리 데려가서 조용하게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지근이 아파오려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손을 휘적휘적 내저었다.
"알았어. 대신, 다음 고기잡이 때 도와야한다."
"엑.. 그건 싫은데."
"그럼 말던가."
"아, 알았어! 할게!"
이야, 감사합니다~ 하며, 레이는 기분 좋게 둥근 눈매를 한껏 휘어 웃는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 동생을 보는 것 같아 머리를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복슬한 감촉이 손끝을 스치자, 그는 강아지마냥 입을 벌리고 웃었다. 로프를 감아 배에 던져놓고 마지막으로 출항 전 점검을 마쳤다. 나와 레이는 차례대로 배에 몸을 올렸다. 노를 물속에 잠구고 천천히 앞뒤로 움직이자 묵직하게 물살을 가른다. 배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등을 둥글게 만 레이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모여드는 눈동자 한 쌍이 부담스러워 나는 노를 저으며 고개를 기울인다.
"왜그래?"
"신은 그 소문 정말 안 믿는 거야? 이미 봤다는 사람이 몇인데."
"안 믿어. 그래도.. 진짜 있다면, 한 번 만나보고는 싶네."
"그치?"
내 말에 레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허공에 떠오른 가락들이 물결치듯 굽어지고 휘어진다. 둥실거리는 가락 위로 겹쳐 오르는 '그 소문'이 덩달아 흔들린다. 애써 잊으려 했던 인어에 대한 소문이. 또 어디선가 주워들은 소문에 빛나는 햇빛 조각을 한 아름 끌어안은 그 푸르른 눈동자가.
'신, 바다에 인어가 있다나봐. 마을에 한 노인이 바다에 나갔다가 노랫소리에 이끌려서 가봤더니 인어가 있었대.'
그러니까 배 좀 빌려주라. 레이는 호기심이 많은 녀석이었다. 많다 못해 은하수가 범람할 정도로 비상했다. 그래서 어린아이에게 우상이 되고 싶어 지어낸 이야기에도 쉽게 속아났다. 어리다고 하면 그렇지 않다고 발끈해 돌아오는 반박에 기가 찬지 오래다. 나는 소문을 믿지 않는다. 동화 같은 설화는 특히나 믿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들은 대게 인간의 호두만한 작은 뇌에서 나오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허상이니까. 믿어서 득이 될 것도 없다. 나는, 소문을 믿지 않는다.
아침 해가 조금씩 밀려들기 시작했다. 투명한 빛깔이 파도를 넘어 유리조각처럼 찬란하게 반짝여 시야를 좁힌다. 잔뜩 신이 난 그 녀석은 온데간데없이 이미 꿈나라 문을 열고 들어간지 한참이 지났다. 곤히 잠든 녀석을 깨울 순 없어, 가벼운 한숨만 푹푹 바다로 떨어트려냈다. 이 시간쯤 부랴부랴 일어날 녀석이, 배 한 척 빌리겠다고 평소보다 2시간이나 이른 시간에 일어났을 테니 졸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쉽게도 덮어줄 담요가 없어 내 코트를 무릎께에 대강 덮어주었다.
그물을 치고 뱃머리에 등을 기대니, 옅은 하늘빛이 시야를 가득 메워온다. 하늘빛을 가만히 시야에 주워 담다, 이내 눈을 스르르 감는다. 한참 전에 레이가 흥얼거리던 노랫가락이 입가에 맴돌아, 나는 그걸 선율로 이어낸다. 부드러운 파도 결을 따라 흘러나오는 선율이 잔잔한 배 위를 소용돌이처럼 맴돌다 바다 아래로 사라진다. 저 깊은, 한 줄기 빛조차 닿을 리 없는 심연으로 깊게도 가라앉는다. 가라앉다가 이내 소용돌이가 꺼지듯 사라지겠지. 선율과 함께 가라앉는 의식이 점점 선잠을 향해 발을 비틀었다. 노래는 이미 멈춘 지 오래였다. 다만, 내 입에서 흘러나오던 노래가 멈춘 지 오래였다. 자장가처럼 편안하고 깊은, 저 바닥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선율에 몸이 노곤하게 풀려갔다. 편안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문득 누가 노래하는지 궁금해졌다. 누가 노래하는 거지? 레이는 잠에 들었다. 생선조차 잡히지 않는 이 바다 위에 있는 거라곤 나와 레이밖에 없는데 대체 누가 노래를 하는 걸까.
'인어는 노래를 굉장히 잘한대. 자장가 같다나, 뭐라나.'
되감기는 기억이 그곳까지 미치자 나른해지던 근육들이 바짝 조여진다. 감았던 눈을 떠올리며 악몽을 꾼 사람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중요한 물건을 찾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느라 아파오는 목덜미를 주무른다. 아무것도, 없..나? 어안이 벙벙해 한참 멍청한 표정을 하였다. 그래, 인어가 어디 있겠어. 그건 다 어린 아이들의 상상력을 키워주기 위한 작은 거짓말일 뿐이야. 그렇게 자신을 다그치며 다시 몸을 기울이자, 자줏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깜빡. 뱃머리에 팔을 걸친 한 여인이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멍청히 그 자줏빛 눈동자를 건너다보았다. 저 먼 우주 어딘가, 홀로 떠도는 외로운 먼지들 사이에 언뜻 비추어보일 듯한 붉은색과 보랏빛이 오묘하게 섞인 눈동자를. 그 눈동자 안에 놀랄 틈도 없이 얼이 나간 내가 넋이 나간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너를 들여다본다. 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 말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담아내어 반사하는 이 눈동자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멍청하게도.
"안녕,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래?"
노랫소리는 멈춰 있었다.
01
하얀색 전등이 시야 위로 쏟아져 내렸다. 시야 가득 담겨오는 빛을 피하기 위해 눈꺼풀을 내리감자 다른 감각들이 선연하게 밝아왔다. 파도가 올랐다 내렸다 하는 소리. 배 위는 멀미가 난다며 질색하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평온하게 잠들었다는 반증이 되어준 레이의 코고는 소리. 그리고….
인어의 노랫소리.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와 부드럽게 배를 어루만지다가 부서지는 파도의 끝자락과 같은 목소리. 어딘가 절절하기도 하고 머리를 쓰담아 주던 어른의 손길처럼 다정하기도 한 가락소리. 그러나 따라 부르기엔 완벽히 재현해낼 수 없는 그런, 아주 오묘한 빛깔의 옥구슬 같은 노래였다. 그 오묘한 빛깔에 홀린 뱃사공들이 배의 머리를 틀어 버릴만 했다. 하여간, 엄청나게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인어는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내게 부탁을 했다. 그물에 어린 물고기가 걸려있는데, 놓아줄 수 있느냐고. 이제야 막 태어난 아이고 부모가 애타게 찾고 있다고. 생선을 잡는 게 내 업이지만 인어의 부탁이라 쉽사리 거절할 수 없어 아기 물고기를 풀어주었다. 인어는 내게 고맙다 하며, 말을 걸 틈도 없이 수면 아래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또 만날 수 있으려나.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삽시간에 옷깃 스치듯 지나간 인연이라 사람을 판단하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는 나쁜 사람 같진 않았다. 날 적부터 사람 가리는 능력엔 탁월한 내가 호언장담할 수 있다. 그녀를 떠올리자 소라고둥 깊숙한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귓가를 범람해온다. 곧 사라질 듯, 허연 안개처럼 희미하게 일렁이는 가락소리가 섞여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파도소리가 들리는. 노랫소리가 들리는 소라고둥의 저 깊은 어딘가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득하고 희미해지며 본격적으로 꿈에 접어들었다.
아침 공기는 차고 맑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노를 느리게 저었다. 어제는 두 명이 타서 그런지 배가 꽉 찼지만 오늘은 종알종알 대는 레이가 없어 자리가 남았다. 레이에게는 어제 일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레이가 알게 된다면, 왜 깨우지 않았느냐 에서부터 시작해 또 보러 가자까지 이어질게 분명하니까. 혼자 인어를 만나고 혼자 배를 타고 떠났다는 걸 알면, 엄청 토라지겠지 그 녀석. 그럼에도 나는 레이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노가 물살을 가르며 나아간다. 부드럽고 묵직한 감각이 손바닥 안을 그득 누르며 움직인다. 파도에 밀려 올랐다 내렸다하는 작은 배가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한 마리의 고래처럼 노랫소리를 찾아 유영한다. 희미한 선율가락. 파도처럼 높았다, 낮았다. 내 귀에 스몄다 흘러나갔다 하는 노랫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사위가 흐린 새벽 공기 속에서 오로지 그녀의 노랫소리만이 또렷해, 문득 꿈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버린다. 안개 탓에 아득히 멀어 보이는 곳에서 검은 인영이 둥실, 둥실 가라앉았다 떠올랐다를 노랫소리에 맞추어 반복한다.
어제도 이 근방이었지. 고래의 코를 닮은 배가 천천히 물살을 가르며 검은 인영에게 다가간다. 두근, 두근.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가슴까지 연거푸 가라앉는다.
“방금 노래 네가 부른 거야? 어제도 그렇고.”
급작스러운 목소리에 그녀는 사뭇 놀랐는지 토끼눈이 되어 황급히 물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거뭇한 바다가 그녀를 삼키고 입을 다물었고 튀어 오른 물방울이 부딪힌 소리만 잔음처럼 남아있다. 통, 통. 구슬이 바닥에 부딪혀 용수철이 튀어 오르는 소리와 흡사했다. 이렇게 보내선 안 되는데. 수면에 비친 거뭇한 그림자가 점점 옅어지는 걸 보고선 뒤늦게 정신을 갈무리하며 수면에 대고 목청껏 외쳤다.
“잠깐만! 해칠 생각은 없어. 안심하라고.”
다급히 쏟아낸 목소리는 음파처럼 수면에 파동을 수놓았다. 잘게 일은 물결이 파도에 휩쓸려 지워지고 그 아래로 검은 그림자가 불쑥 다가와 나는 굽혔던 허리를 폈다. 수면 위로 눈과 코만 빠끔히 내놓은 그녀를 보며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솔직히, 다시 올 줄은 몰랐다. 그대로 갔다면 필시 아쉬웠을 터이지만 돌아온 그녀를 보자 기쁨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가볍게 입 꼬리를 베어 물며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인간의 말을 어떻게 믿어? 인간은 우리 가족을 잡아먹는데.”
“어제 부탁도 들어줬는데, 그걸론 안될까?”
생각에 빠진 그녀의 속눈썹이 낮게 내려오며 눈빛이 가라앉았다. 지나간 호의를 빌미로 부탁하는 건, 역시 조금 치사한가. 거절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하던 찰나에 그녀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알았어. 대신, 너무 접근하진 마.”
오옷, 고마워! 신이 나서 곧장 뱃머리에 자리를 잡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정도면 돼? 응. 내려오지는 말고. 당연하지. 그런 대화를 이어가다가 나는 줄곧 입술 끝에 맺혀있던 말을 톡 밀어내었다.
“노래 네가 부르는 거야?” 정말 맥락 없이 튄 질문에 그녀는 사뭇 당황한지 가늘게 신음했다. 으음.. 늘어지는 소리 위로 점이 한 세 개쯤은 굴러가는 것 같았다. 점 세 개의 침묵이 지나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질문에도 오래 고민하는 것을 보아하니, 그녀는 아무래도 신중한 성격인가보다. 노래도 그녀가 부른다고 했다. 이로서 나는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게 두 가지나 늘었다. 별 거 아닌 사실에도 내 기분은 구름 사이를 비집고 항해하는 비행기처럼 둥실 떠올랐다. 나는 입가를 시원하게 밀어 웃으며 하얀 이를 드러내 보였다.
“굉장하네. 엄청 잘 부른다고 생각했거든.”
“노래는 인어의 무기나 마찬가지니까.”
무기? 되풀어 중얼거린 말에 그녀가 확인시켜주듯 그래, 무기. 라고 답한다. 인어의 무기.. 그럼 다른 인어도 있다는 말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나는 숨기지 않고 그녀에게 던졌다.
“너 말고 다른 인어도 있어?”
“많아. 다만 그 아이들은 수면까지 올라오는 일이 적어. 나이가 어리거든.”
“그렇구나. 그럼 네가 연장자인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편엔 속하지.”
나이가 꽤 있다. 다른 인어들도 많다. 그녀는 종종 수면 위로 올라온다. 벌써 아는 사실이 6가지가 되었다. 타인을 알아간다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해 나는 타인과 대화하는 걸 좋아한다. 너는 더욱이었다. 육지에 사는 인간들과 달라서 그런가. 입가에서 웃음이 걷히질 않았다. 마치 폭풍우 끝에 며칠 만에 나간 고기잡이에서 대어를 낚은 기분이었다.
물고기.. 아, 어제의 그 물고기. 그 아이가 없었더라면 아마 그녀를 만날 일도 없었겠지. 인연의 끝을 입에 물고 항로도 없는 이 바다 위에서 엮어준 고마운 물고기의 안부가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풀어준 아이는 어떻게 되었어?”
“덕분에 건강해.”“그래? 다행이네.”
내심 마음에 걸리던 문제였다. 혹시 그물에 걸려서 버둥거리다가 어디 다치진 않았을까. 하고. 누군가의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고기를 잡기 전에 꼭 망설여진다. 그래도 가업이니까 이행하는 건 맞지만.. 가슴이 파란 하늘을 담은 듯이 맑아졌다. 후련하다. 뒤로 드러누우며 가만히 하늘을 눈에 담았다. 파랗게 일렁이는 하늘, 솜사탕을 고대로 띄운 것처럼 흘러가는 뭉게구름. 잔잔하게 귓가를 쓸었다 흘러나가는 파도소리. 그리고, 너.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은 날이다.
문득 정말 갑자기 뱃머리가 기우뚱하더니 푸른 시야에 그녀의 얼굴이 가득 들어찬다. 깜짝 놀라 경직된 나는 그저 눈을 최대한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느리게 여닫히는 시야엔 네가 하늘처럼 가득하다.
“……그거 물어보려고 온 거야?”
속눈썹을 푹 가라앉히며 물어오는 눈동자에 비추어진 나는 퍽 꼴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어 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어제 만난 아기 물고기의 안부가 마음에 걸린 건 사실이다. 가족의 품으론 잘 돌아갔으려나, 같은. 유원지에서 발견한 미아를 보는 기분이 되어 살짝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고기잡이가 본업인 내가 이런 걱정을 한다는 것이 모순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나는 가만히 숨을 고르며, 그녀의 눈동자 속에 어지럽게 얽힌 나의 초상을 건너다보았다. 귓가를 둔중하게 울려오는 고동소리와 달리 지독히 차분한 표정이었다.
“음.. 그건 아니고. 그냥 한 번 더 만나보고 싶었어.”
“왜?”
숨결이 잘게 떨리었다. 가만히 그 눈을 들여다보는데 작은 호기심이 별처럼 알알이 빛나고 있어 마치 우주를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인어라서 그런가. 눈이 조금 특이하네. 그런 생각을 하며 우주 공간 언저리를 떠도는 초상을 바라보고 있으니 하나의 감정으로 콕 집어 이야기할 수 없는, 오묘하고 신비로운 기분에 휩싸이고 만다. 나는 그 무한한 우주에 속마음을 다 털어놓아도 좋을 것 같아, 마음이 가는대로 말을 꺼내 들었다.
“인어는 그냥 만들어낸 이야기인줄 알았거든. 그래서 알고 싶어졌어.”
내 말에 곧 그녀의 동그란 눈동자가 울컥 일그러졌다. 코끝으로 웃음을 걷어차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붉은 눈빛에 언뜻 경멸이 스친 것 같기도 하다. 너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놓고선 무겁게 말을 비집어 냈다.
“인어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거였어?”
“아니, 그냥 너에 대해서.”
인어에 대한 호기심도 새싹이 막 잎을 틔운 것처럼 작게나마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종족을 떠나 그보다 조금 더 근본적인, 너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네가 어떻게 숨을 쉬는지 보다는 네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담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알고 싶었다. 너에 대해서.
"…다른 인간들은 다 인어에 대해서만 궁금해 했어. 넌, 좀 이상해."
"이상하기 보다는 특별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진짜 이상해."
"그런가?"
뭐, 그게 중요한가. 자줏빛 눈동자에 말끔하게 밀어 올린 입 꼬리가 내걸린다. 멍청히 입을 벌리고 있던 그녀가 눈썹을 울컥 구기더니 이내 몸을 훽 돌려버렸다. 시야에 흐르던 자줏빛이 거두어지자 파아란 하늘이 하얀 구름을 몰고 온다. 갑자기 쨍한 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뒤집어 파문만 잔뜩 일었던 수면을 바라본다. 어이, 너. 이름도 안 알려주고 도망가는 거야? 적어도 왜 그러는지는 알려줘야지.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수면에 대고 아무리 외쳐 봐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목소리의 파동에 흐트러진 수면은 올라오는 파도에 휩쓸려 내 목소리와 함께 금세 사라지고 만다. 닿을 리가 없나. 그리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던 찰나.
"바보."
코앞에 자줏빛 눈동자가 들이밀어지고, 이내 차가운 감각이 온 몸을 뒤덮는다. 찰팍, 하고. 시원한 물줄기가 얼굴에 닿았다. 그것도 왕창. 보송보송하게 뜬 머리카락이 물을 뒤집어쓰고 미역줄기마냥 가라앉는다. 시야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그저 감겨 오르고 풀리는 눈꺼풀 사이에 장난기 어린 눈매만이 가늘게 휘어진 채 맺혀 있었다.
02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카논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가에 꿈 몽 자를 쓴다고. 우주 저 어딘가에 존재할 은하계 같은 눈동자를 품은 그녀에게 딱 맞는 이름이었다. 나는 이른 아침, 새벽안개 사이를 적적히 유영하며 그녀를 만나러 갔고 우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처음으로 그녀가 제 손을 눈앞에 쫙 펼치며 보여주기도 했고 마을의 여느 어린아이처럼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런 카논을 보면 영락없는 인간 여자아이였다. 나는 종종 그녀가 인어라는 사실마저 잊었다. 카논은 그저 카논이었다. 내가 알고 싶어 하던 그녀인 채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노랫소리를 항로 삼아 노를 저었고 카논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뱃머리에 상체만 매달린 채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다. 카논이 하는 이야기들은 이따금 다른 차원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멀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내가 아는 바다라고 생각하니 또 손에 잡힐 만큼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문득 이걸 레이가 들었다면 눈을 반짝이며 신기해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그녀에게 물었다.
"친구에게 너를 소개해줘도 될까?"
노랫소리처럼 재잘대던 목소리가 끊어지듯 멈추었다. 부푼 뺨이 바람 빠지듯 가라앉으며 귀에 걸린 입 꼬리가 순식간에 아래로 떨어진다. 누가 봐도 반갑지 않은 표현이었다. 숨조차 잊은 듯 꼼짝하지 않던 그녀의 입이 희미하게 달싹이며 말을 조합해낸다.
"나는 인간이 싫어."
"하지만 나도 인간이야."
그녀는 어딘가 억울하다는 듯이 입술을 구겨 물었다. 사납게 일그러진 눈동자에는 일말의 배신감이 화살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녀의 구겨진 입술이 달싹이며, 이곳저곳 모난 말을 비집어냈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무지하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무지한채로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었다. 모르니까. 무지하니까. 조금 더 알아 가면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사람은 사람을 알아가길 바란다. 혼자는 외로우니까. 그래서 나는 그녀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모르니까 알고 싶은 거야.”
카논은 한숨을 토하더니 입술 끝을 굳게 다물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조금 둥그스름한 말들을 모으고 골라 정리하고 있는 눈치였다. 인어는 노랫소리로 인간을 홀린다. 그게 등대와도 같은 역할을 하지만, 벌을 받아야하는 인간은 그대로 바다에 빠트린다고 했다. 인간들은 단면적인 부분만 보는 단순한 경향이 있어 이야기는 쉽게 왜곡되고 만다. 이미 한 번 구르기 시작한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불어났고, 인간에게 인어란 ‘노랫소리로 인간을 현혹하여 잡아먹는 무자비한 존재’ 라는 식으로 각인되었다. 이 작은 말 한 마디가 모난 돌멩이로 되돌아온다. 인어를 팔아넘기겠다는 사람도 속출하고 인어에게 해코지를 하고자 팔을 잡는 바람에 화상을 입어 죽는 인어도 심심치 않다고 한다. 그중 가장 많은 학대는, 언어. 형태를 띄우고 있지 않는. 무형의 목소리는 비수로 변하여 살갗을 따끔따끔 찔러온다고 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인어는 모습을 감추게 되었고 현재에는 인어란 그저 설화 속의 존재로 남아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그 한낱 종이쪼가리. 불어나버린 눈송이의 뒤편에 인어는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이다. 카논은 눈을 가라앉히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그런데, 하고 운을 떼며 이야기의 살을 덧붙였다.
“너는 나에게 돌을 던지지도, 막말을 하지도 않았잖아.”
그건 당연한 거야. 라고 답했을 때, 그녀는 어딘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딱 한 가지의 단어로 형용하기 어려운 그녀의 눈동자처럼 속을 헤아릴 수 없는 표정이었다. 어딘가 슬퍼 보이기도 하고, 조금은 놀라기도 한. 그 속에 작게 서려있는 기쁨 같은 거. 해가 지고 있었다. 그녀는 배에서 멀어지며 나를 가만히 건너다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였지. 너는, 내게 특별한 존재야.
마을이 이상하다고 느낀 건,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바다에 나갔다 온 직후였다. 아버지는 물론이며 레이까지 마중을 나와서는 괜찮으냐며 몸을 이곳저곳 탐색하던 게 아닌가. 누가 봐도 이상한 행동에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기가 차서 헛 웃을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인어가 사람을 잡아먹었대. 내 친구의 아버지도 잡아 먹혔다고.’
방금까지 인어랑 있었는데, 무슨 소리야. 이 말이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려서 나오질 않는다. 목에 걸린 말 때문에 숨이 자유로이 드나들지 못해 결국 호흡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침이 무겁게 떨어졌다. 나는 애써 호흡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괜찮다며 웃어 넘겼다.
왜 그랬지? 나는 방바닥에 누워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습관은 아닌데, 그저 어지러운 생각을 천장에 나열하면서 하나, 둘 정리하는 걸 좋아했다. 왜 그랬는지. 내가 인어와 친하다는 걸 알면 마을 사람들이 배척할까봐? 절대 아니었다.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이건 조금 그럴싸하네. 우리 부모님은 연세가 있으시니 하나 뿐인 아들을 잃는 건 아무래도 두려우시겠지. 하지만.. 이거 때문은 아니었다. 조금 더, 심오한 감정이었다. 불안하고 두려운. 검은 손아귀가 목을 움켜쥐는 것처럼 일순 숨을 한 자락 내뱉지 못하던 그 감각이 아직도 선연하다. 두려움. 무엇이 두려웠을까. 내가 만나는 인어가 유해한 존재라는 거? 아니다. 아닌 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조금 혀에 가시를 내두르고 있지만 속은 진심으로 따뜻한 아이였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나 역시 따뜻한 물속에서 반신욕을 하는 것처럼 피곤이 풀리곤 한다. 하루 일과 중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하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아
탄식이 입술을 비집었다. 바람처럼 흩어지는 단말마의 흐림 속에서 나는, 한 가지의 답을 잡아낼 수 있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걱정되어서 두 발을 뻗고 잘 수가 있어야지 말이야.”
오늘은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오지 않은 줄 알았다. 인어의 정보통은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인간들의 소식을 빠르게 접할 수 있다고 했으니 아마 어제의 소문을 벌써 들었겠지. 생각이 많은 카논이라면 이것저것 혼자서 끙끙 앓았을 터이다. 그녀는 조금 쌉싸래한 표정을 한쪽 뺨에 내비치며 입 꼬리를 들춰 웃었다.
“……나는 인간을 잡아먹었어.”
“알아.”
“그럼 왜 온 거야?”
너를 만나고 싶어서. 네가 좋아서. 너와 대화하고 싶어서. 너를 알고 싶어서. 너를, 보고 싶어서. 만나고 싶은 이유는 수도 없었다. 너를 만나지 못하는 게 두려워서. 그러나 나열하고 보면 결국엔 비슷한 이유였다. 그저 보고 싶었다. 아주 잠시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머릿속은 마치 새벽안개가 그득한 항로같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넓디넓은 바다 속을 누비는 고래처럼 내 머릿속을 헤치고 다녔다. 그 허연 안개 속에서 오로지 카논의 얼굴만 또렷해, 이를 등대삼아 오다보니 어느새 너의 앞이었을 뿐이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너를 좋아한다. 좋아하게 되었다.
“…네가 좋아서.”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문자 그대로 정말 뚫어버릴 기세였다. 아무래도 힘들겠지, 이런 거. 알고 있었지만 현실로 받아들이려니 마음이 석연치 않았다. 나는 쌉싸래한 초콜릿을 크게 베어 문 것처럼 한 쪽 입 꼬리만 베어 물었다. 나를 좋아해? 확인하듯 재차 물어오는 목소리가 어렴풋 떨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새겨 말하듯이 힘을 주어, 아주 또박또박 말했다. 좋아해.
“…그럼 나랑 두 가지만 약속 해줘.”
약속?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는 당황스러워서 눈만 끔벅였다. 내가 대답이 없자 그녀는 일단 무작정 말을 이어나갔다. 이걸 약속한다면 나는 너에게 진심을 이야기할게.
“첫째, 나와 영원을 함께할 것. 둘째,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나를 미워하지 않기.”
침묵은 소용돌이처럼 우리 사이를 뱅뱅 돌다가 바다 아래로 퐁당 가라앉았다. 마침표를 찍은 말끝은 어딘가 쓸쓸하게 들린 것 같다. 그녀의 눈동자가 붉은 선을 그리며 나에게 뻗어온다. 그 눈동자를 보면, 영원이라는 걸 믿고 싶어진다. 모든 것엔 끝이 있고 그저 소문 같기만 한 허상. 그런 영원을 믿어보고 싶어졌다. 상대가 너라면, 너를 영원이라고 안식하고 싶다.
“약속해.”
“너 진짜 이상한 애야. 처음부터 끝까지.”
“그래서 대답은?”
나의 독촉에 그녀가 살짝 미간을 일그러트리는가 싶더니, 붉은빛이 섞인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의 언저리에는 도화색이 꽃물 들듯 번져있었다.
“…나도야.”
"뭐가?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피식 웃음기 서린 목소리에 그녀가 미간을 확 찌푸린 채 팔을 뻗어왔다. 얼음장보다 차가운 팔이 목을 감싸고 아이스크림처럼 보드라운 입술이 맞닿는다. 분명히 얼어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차가운 체온이었지만, 나는 화상을 입은 것처럼 그녀에게 닿은 곳곳에 발갛게 열꽃이 피어올랐다. 그녀의 볼을 감싸며 몸을 기울였다. 나룻배가 크게 휘청하여 조금 어지러웠다. 그리고 한 가닥의 선율같이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안식의 끝자락까지 끌어내리는 목소리가 덧없는 인어의 숨결처럼, 방울방울 터져 귓가를 가득 메웠다.
"나도, 널 사랑해."
03
Side. R
"그러고 보니 레이, 그 이야기 들었어?"
오늘도 어김없이 야채장수는 몸을 낮추어 목소리를 내리 깔았다. 이 사람은 본업이 야채장수이긴 하지만, 나는 종종 그를 '이야기꾼'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따금 마을 광장에서 아이들을 불러 모아 온갖 이야기를 펼쳐냈기 때문이다. 하얀 도화지 위로,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색들이 쏟아지며 아이들의 마음까지 잉크가 스미듯 번져간다. 나도 몇 번인가 혹해서 엉덩이를 무겁게 깔고 앉아 들은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매번 그랬다. 물욕은 어찌 참을 수 있다 해도, 자석처럼 당겨지는 그놈의 호기심은 손쓸 도리가 없었다. 나는 오늘도 어찌할 길이 없는 한낱 감정에 이끌려 귀를 기울였다. 뭔 얘기?
“요즘 들어 인어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대.”
아, 그래. 인어. 그렇지. 매혹적인 노랫소리로 뱃사공을 홀려 잡아먹는다는 인어 말이지. 듣자하니 잡아먹는 방식도 굉장히 잔혹하다던데. 물에 빠트리고, 머리를 내려치고, 피를 빼고…….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충격이 여간한 게 아니었다. 인어에 대해선 나도 궁금한 참이었다. 신은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으니 행방을 물을 길이 없고. 배를 타고 나가자니 마땅히 손을 빌릴 곳도 없고. 나는 인어라는 말에 조금 더 신경을 곤두세우며 상체를 숙이면서까지 집중했다.
"요 앞 바다에 어부의 아들이 사라지고 난 후래."
뭐? 어부의 아들이라면 신이 분명하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 두 눈을 크게 뜨고 이야기꾼을 바라보았다. 정말이라니까. 그 가족들은 아침 일찌감치 나가서 파도에 휩쓸린 줄 아나봐. 영혼이 빠져나가듯 하얀 탄식이 입술 틈을 비집고 새어나갔다. 그래서 요즘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기운이 없으셨구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자글자글한 주름들이 윗니 아래에서 사정없이 구겨져 아팠다. 심장이 심해까지 잠겨드는 기분이다. 속이 먹먹하다.
“아무래도 인어에게 잡아먹혔다는 소문이 도는 모양이야.”
소문. 나는 간단명료한 문장 안에서 돌부리처럼 툭 튀어나온 단어를 혀끝으로 둥글게 쓸어 담아 보았다. 모난 자갈처럼 혓바닥을 날카롭게 할퀴어오는 단어에 미간을 파삭 구기고 말았다. 결국 당신도 모른다는 거잖아? 심해까지 가라앉았던 심장이 이번엔 기포처럼 부글부글 끓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나는 그 깊고 낮았던 곳에서 한 순간에 올라온 기분에,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그 녀석, 대체 인어랑 어떤 관계였을까.”
한창 인어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설이 돌았을 때 그 녀석이 두 팔을 걷으면서까지 나섰다고 했다. 이야기꾼에서 돌아온 야채장수는 내가 부탁한 야채를 봉투에 담아 건네며 연인이었을까. 라는 말을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야채 봉투를 받아 드는 그 순간까지도 연인이라는 단어를 애써 듣지 않은 척, 안들은 척을 해야 했다.
“인어와 사랑에 빠진 남자를 알고 있니?”
또다. 오늘도 어김없이 이야기꾼이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아이들은 이야기꾼이 공터로 향하는 발자국만 봐도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쥐처럼 몰려들었다. 근래에 마을을 떠들썩하게 한 존재여서 그런지, 아이들은 눈에 한껏 별을 밝히며 이야기꾼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평소라면 나도 어린아이들 사이에 끼여서 저 밝은 별무리들 중 하나가 되어 빛을 발했겠지만 오늘은 그저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이건, 그 누구도 모르는 이야기란다.”
이야기는 돌고 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언젠간 사람을 깔아뭉갤 만큼 불어나는 게 소문이다. 이야기꾼은 눈을 뭉치고, 언덕에서 밀어내는 역할을 한다. 비탈진 경사를 거칠게 구르고, 구르고, 구르는 눈덩이는 금세 부피가 배로 달하겠지. 그렇게 하염없이 굴러가는 눈덩이라도, 누군가의 이야기가 전해진다면 그 사람은 떠난 게 아니지 않을까 라는 철없는 생각을 잠시간 해본다. 나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발끝을 틀었다. 힘겹게 떨어지는 발걸음이 눅눅한 땅 위를 무겁게 짓누르며 나아간다. 남겨진 발걸음 위로 작은 목소리가 눈덩이처럼 또르르 굴러온다.
“인어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물거품이 되어 인어의 숨결이 되고.”
이건,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될. 어린 가면 뒤에 숨겨진 아주 잔혹한 한 편의 동화이다.
"인어는 평생을 고독 속에서 헤엄치다가, 죽은 고래의 뼈처럼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단다."
그 동화가 지금부터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끝도 없는, 어쩌면 설원보다 차가운 저 심연의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