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너머로 바라본 세계
카논
데스노트
멜로 X 티에라
망각(妄却)의 선
By. 카논(@do_u_darling)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은 세 종류의 것으로 존재한다고 했다. 망자(亡者)들이 살고 있는, 흔히 말하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세계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 그리고, 그 중간에 존재하는 세계들. 그 중간층의 세계는 하늘의 지평선 너머에 있다고 했다. 우리들의 눈으로는 채 볼 수 없는 하늘과 하늘을 이어주는 커다랗고 넓은 선. 그 너머에, 그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천국도 지옥도 가지 못하는 자들만이 가게 되는 그 곳. 그들이 제2의 삶을 사는 세계. 어머니는 그런 말을 하면서 내게 귀띔해주곤 했다.
“현세에 미련이 남은 자들은, 반드시 그 세계에 가고 만단다. 자신의 삶에 만족스럽지 못했으니까. 그들은 현세(現世)와 그 세계를 돌아다니며, 하릴없이 그들의 영혼이 깎이고 사라지기만을 바란단다. 다른 사람들처럼 말이지.”
그래서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현세에 미련이 남지 않으면, 그들은 어디에 가느냐고. 한 번 그 지평선 너머의 세계에 가게 된 이들이,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게 된다면, 그들은 어디에 가게 되느냐고. 어머니는 나의 질문에 웃으면서 대답해주었다. 그러면 그들은 사라진다고. 그들이 본래 있어야 할, 무(無)로서, 이 세상에서부터 온전히 사라지게 된다고.
내가 그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어머니에게서 들은 건 근 10년 전의 일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쉬이 잊지 못했다. 내가 잠들기 전이면, 내 곁에 앉아 자장가를 들려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때는 여럿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내가 결국 이 나이가 되도록 정확하게 알 수 없었던, 죽은 아버지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지금 생각해보면 터무니없는 헛소리에 불과한 이야기였다. 명계(冥界)과 현세(現世) 사이에 존재하는 세계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코 그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가 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댄, 오늘은 언제 들어올 거니?”
어머니는 그렇게 물어보면서 녹색 액체가 든 컵을 내게 건넸다. 나는 굽고 있던 베이컨을 뒤집고는 스무디를 한 번에 들이켰다. 어머니와의 아침 식사는 언제나 분주하다. 외과의사로서 일을 하고 있던 어머니가 몇 달 전에 오래 근무하고 있던 종합 병원을 나와, 본인의 병원을 차리고 난 이후로는 늘 그랬다. 나도 이제 많이 컸고, 혼자서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는 게. 어머니가 병원을 옮긴 이유였다. 어차피 우리 스위티는 어릴 때부터 너무나도 어른스러웠으니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하고 미소 짓던 어머니다.
“오늘은 학교가 끝나면 동아리 활동이 있어. 오케스트라부, 다음달에 콘서트를 열잖아. 그래서.”
“오, 연습 때문에 조금 늦어지는구나. 그럼 끝나면 내게 연락해주겠니? 오늘은, 댄 스위티도 알다시피 윈체스터에 볼 일이 있거든.”
“벌써 그런 시기던가.”
그런 말을 하며 창 밖을 바라보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저런 추위를 뚫고 윈체스터까지 가야 한다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어머니가 매년마다 이 날을 챙기는 건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쭉 이어진 일이었으니까. 아무리 바쁘고 정신이 없더라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그 날을 거스르는 날이 없었다. 어린 내게 급한 일이 생기면 나를 친구에게 맡겨두고 혼자서 다녀올 정도로 어머니는 이 날을 중요시 여겼다. 마음만은 이해한다. 어머니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했던 그 사람이 죽은 날이니까.
“최대한 빨리 오도록 할게.”
“그래, 오늘따라 눈이 많이 내리는데 길 조심하고. 무슨 일이 생겨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니.”
“나는 그렇게 둔하지 않아.”
나의 대답에 어머니는 빙긋 웃었다. 홀로 나갈 채비를 전부 마친 어머니는 곱슬거리는 단발 위에 검붉은 베레모를 걸치더니, 식탁에 앉아서 베이컨을 씹는 나의 볼을 가죽장갑을 낀 양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다.
“그럼 이따가 보자, 스위티. 오늘도 학교 조심해서 다녀오고, 공부 잘 하고 오는 거야. 알겠지?”
“응, 학교 끝나고 나서 연락할게.”
고갤 끄덕이면서 말하자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환하게 미소를 지어주고는 재빠르게 밖으로 나섰다. 토스트를 손에 들고 거실의 창문에 기대어 차를 타고 떠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눈짓으로 배웅했다. 눈보라 속에서 어머니의 검은 차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반쯤 먹은 토스트를 입안으로 우겨 넣고는 교복을 입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나의 평범한 생활은, 그렇게 또 시작되는 것이었다.
방과후, 피아노의 조율을 하고 있는 나에게 같은 오케스트라부에서 퍼스트 바이올린을 맡고 있는 데이비드가 말을 걸어왔다.
“다니엘, 너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간다며?”
나는 고갤 끄덕였다.
“오늘 저녁에는 볼 일이 있어서. 어머니와 같이 나가야 해.”
“아, 맞다. 그……. 오늘은 네 아버지의 기일이라고 했지?”
“……….”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라, 그 남자를 과연 내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섣불리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데이비드는 멋대로 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사과해왔다.
“미안해, 힘들 텐데 이런 말을 해서…….”
“아니, 괜찮아. 익숙해졌어.”
아무렇지도 않게 빙긋 미소를 지으면서 그에게 대답하자 그제야 데이비드는 마음이 놓인 듯 저도 밝게 웃었다.
“네가 리드 피아노라서 다행이야, 다니엘. 네 피아노 실력은 확실하니까. 네 어머니께서 피아노를 치신다고 했던가?”
“아니, 어머니에게 악기는……. 쥐약이야. 어머니는 음악적 재능이 별로 없거든.”
데이비드는 헤에, 하고 관심을 보였다.
“그러면 네 피아노 실력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건 아닐까, 다니엘? 보통 이런 건 음악적 재능이 없으면 힘들잖아.”
“…아버지가 피아노, 말이지.”
별로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머니에게서 들은 그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공부라던가, 그가 인생에서 겪었던 수많은 일들뿐이었지, 예술 같이 고상한 일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었다. 오늘 가는 길에 물어볼까? 어머니는 그럼 뭐라고 대답해줄까? 평소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네가 달링을 닮아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말을 해줄까?
“그건 그렇고, 내게 그런 말을 하려고 일부러 조율 시간에 날 찾아온 건 아니겠지, 데이비드? 무슨 일이야?”
“여전히 다니엘은 차갑구나. 뭐, 별 거 아니야. 이번에 두 번째로 연주하는 곡에 대해서 말인데…….”
데이비드는 그런 말을 하면서 나에게 표현 방법에 대해 상담을 해왔다. 나는 데이비드에게 대답을 해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를 떠올리면, 언제나 떠오르는 그 기억이 어렴풋이 되살아났다.
내가 처음으로 윈체스터에 갔던 그 날에 대한 기억. 그게 꿈이었는지, 그게 아니면 단순한 환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날 똑똑히, 그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와 어머니가 함께 지냈던 고아원. 그 안에서 만났던, 어린 그의 형상. 나에게 환하게 웃어주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던 그의 손길도 기억한다. 어렸던 나는 그게 전부 진실이라고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생생한 기억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곧장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 건 당시 내가 너무나도 충격을 먹었기 때문이리라. 그게 아니면 처음으로 그 남자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된 것이, 그 날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때 그 남자에게 좀 더 물어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와 후회해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마는 것이었다.
데이비드와의 이야기가 끝난 뒤 나는 아버지를 떠올려 복잡해진 마음에, 피아노 앞에 앉아 조용히 건반을 누른다. 건반이 부드럽게 눌리고, 곧장 들려오는 청아한 소리가 귀를 감싸오며, 나는 평안한 마음에 잠긴다. 피아노를 치는 건 나의 유일한 즐거움 중 하나이다. 늘 내가 1등이 되길 바라는 어머니에게 답하기 위해 공부를 하다 지치거나,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나를 향해 던져지는 가엾은 시선들에 지치거나, 가끔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낡은 로켓 목걸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할 때에 나는 늘 피아노를 찾았다. 나에게 있어서 피아노는 도피처나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에서 떠날 수 있는, 그런 도피처.
나의 손가락은 건반을 흘러가듯이 움직인다. 눈을 감고 음악에 온 몸을 싣는다. 잔잔하게 흐르는 에뛰드의 곡을 치면서 모든 것을 잊는다. 오늘 저녁에 또 찾아갈 그 차가운 묘비도, 그 앞에서 검은 옷을 걸친 채 언제나처럼 슬픈 표정을 짓고 있을 어머니의 얼굴도, 내가 어린 시절 보았던 그 남자의 밝은 어린아이의 모습도.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이렇게까지 마음이 편해진다는 걸, 나는 피아노를 만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다니엘!”
누군가가 급히 나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꿈을 꾸는 것만 같은 시간에서 홀연히 깨어난다. 절로 손가락이 멈춘다. 길게 이어지던 나의 선율은 그 자리에서 끊겨버리고 만다. 아직도 음악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처럼, 모든 것이 무척 느리게 흘러간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니, 데이비드가 무척 당황한 얼굴로 천장을 가리키고 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돌려 천장을 바라본다. 커다란 샹들리에가 이 쪽을 향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의자에서 상체를 들어올리고, 옆으로 몸을 던지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샹들리에를 확인한 그 순간, 어째서인지 분명 방금 전까지 느릿느릿하게 부유하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재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 그 커다란 샹들리에는 나를 향해 무섭게 떨어져 내린다. 채 피할 수가 없었다.
와장창, 하는 지나치게 큰 소리와 함께 단번에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온몸이 무거웠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 답해주지 못했다. 캄캄해진 눈꺼풀을 들 힘도 없었다. 고통은 나의 모든 감각을 앗아갔다. 나는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깊고 깊은 어둠 속으로, 나는 이끌리는 대로 흘러나간다. 아, 이대로 죽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어나.”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그제야 눈을 떴다. 온몸이 차갑고, 덜덜 떨려왔다. 몸을 천천히 올려 주변을 둘러본다. 눈이 펑펑 내리고 있는, 새하얀 숲에 나는 쓰러져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있던 걸까,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몸이 꽁꽁 얼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목을 돌려다가,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길고 시커먼 후드를 눌러 쓴 남자가 그 곳에 서있었다. 나는 바람에 흩날리는 천 너머로 보이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보고서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대체 왜 당신이 여기 있느냐고 묻고 싶은 건, 바로 나였다.
“왜 이런 곳에 당신이 있는 거지?”
그게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에 나온 말이었다. 남자는 귀찮다는 듯이 짧게 혀를 찼다. 눈을 깜빡 거리며 아무리 봐도, 그 남자임이 분명했다. 어머니가 몇 번이고 이야기를 해주고, 중학생이 된 나에게 그제야 낡아빠진 로켓 목걸이의 내부를 보여주었던 그의 얼굴이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 얼굴 한 쪽을 덮은 화상자국이 흉측스러웠다. 모든 것이 어머니가 말한 그대로였다. 어머니의 말대로, 그의 얼굴은 나와 무척 닮아있었다. 거울을 보면서 그의 얼굴을 떠올렸던 나의 행동은 아무래도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온 세상을 뒤덮은 눈만큼이나 차가운 말투로 내게 말했다.
“너는 아직 이 곳에 올 필요가 없을 텐데. 어쩌다가 여기까지 도착한 거지?”
“나도 모르겠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여기에 있었는걸.”
“…그래.”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내밀어 나의 옷자락을 붙잡아다 일으켰다. 가죽 장갑을 낀 그의 손이 옷깃 사이로 드러난 맨 살에 닿자 나는 그 차가운 감각에 움찔거리고 말았다. 남자는 그런 나를 힐끗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내 뒤를 돌아 저벅저벅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선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남자는 옅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따라와.”
“그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여기는 어디지?”
“……….”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내게 등을 보인 채 계속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서둘러 그를 쫓는다. 그가 입은 새까맣고 길다란 후드자락이 휘몰아치는 눈바람에 거세게 흩날렸다. 강한 바람을 맞은 내가 재채기를 하자, 남자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품에서부터 작은 등불을 꺼내다가 안겨주었다. 손바닥 정도의 크기의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남자가 다시 발을 옮기면서 천천히 말해주었다.
“그건 네가 온기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줄 거야. 절대 몸에서 떼내지 마. 이 숲은 나조차도 춥게 느끼니까.”
나는 순순히 그것을 교복 가슴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덜덜 떨고 있던 나의 몸이 단번에 제 온도를 찾아가면서, 이 추운 눈보라 속에서 얇은 교복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뜻하다고 느끼게 된다. 신기하다. 이 곳이 내가 있던 세계가 아니란 건 똑똑히 알았다. 그건 이 남자를 내가 직접 보았을 때부터 알고 있던 것이지만, 새삼스럽게 나는 그것을 확인했다.
“적어도 이 숲을 나갈 때까지는 계속 그걸 들고 있어. 밖은 괜찮지만, 이 곳만큼은 ‘너 같은’ 인간들이 맨몸으로 지나가기는 어려워. 보고를 듣고 일찍 도착하길 잘했군.”
수수께기 같은 말을 내뱉으면서 남자는 성큼성큼, 그저 똑같아 보이는 숲을 아무런 주저 없이 나아간다. 그는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닌 존재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따라가면서 쏟아지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당신은 여기서 뭘 하고 있어? 여긴 어디야?”
“질문은 하나만 해.”
그렇게 말하고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꼭 대답을 안 해줄 것만 같았지만, 의외로 그는 다소 귀찮아 보이는 말투로 답해주었다.
“너 같이 생과 사를 헤매는 녀석들을 원래 있는 자리로 돌려주는 일을 하고 있어. 죽은 이라면 죽은 이가 있어야 할 곳으로, 살아있는 자라면 살아있는 자가 있어야 할 곳으로. 길을 잃은 이들을 인도하는 거지. 과거에 수많은 사람을 고통 받게 했으니까, 나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고 이 곳의 ‘주인’은 말하더군.”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 그렇다면 이 곳은 천국인 걸까?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차갑고 새하얀 눈만이 가득하다. 역시 천국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살풍경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지옥? 그러나 지옥이 이렇게 차가운 곳일 수 있을까? 궁금증은 쉬이 풀리지 않는다.
“나는 그럼 죽은 거야?”
소박한 내 질문에 남자는 고갤 내저었다.
“거의. 하지만 아직 죽지 않았어. 너의 죽음의 시간은 이 시간대로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위쪽 녀석들이 제멋대로 네 시간을 줄이지 않는 한, 너는 아직 살아가야 해. 그게 이 곳의 ‘주인’의 방침이지.”
“이 곳, 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럼 지금 천국에 있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지옥?”
“아니, 이 곳은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야. 내가 이 곳에 있다는 게 무엇보다도 큰 증거지.”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는 건, 그 어떤 종교에서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아니던가? 남자는 한참 말없이 걷다가 천천히 덧붙였다.
“나는 천국에도 지옥에도 가지 못해.”
“어째서?”
“’사신의 물건’을 만진 자에게 그런 자비는 허락되지 않아.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생명을 건드린 자들에게 말이지.”
나는 말없이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어렴풋이,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가 죽게 된 원인이 된 그것, 그와 어머니가 마피아로서 활동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줄 때 들었던 이야기다. 사신의 노트. 그 시커먼 노트에 사람의 이름을 적으면 죽는다고 했던가?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헛소리 같았지만, 어머니의 눈빛이 너무나도 진지했기 때문에 나는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 이 남자가 말하고 있는 사신의 물건이란 녀석일 테다.
“…거의 다 왔어. 숲을 벗어나면 문을 지나서 너를 지평선으로 데려갈 거다. 그러면 너는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고 보니 어두컴컴하던 숲 속에서, 서서히 빛이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지평선이란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어머니가 말했던 그 이야기가 스쳐 지나간다. 하늘의 지평선 너머에 있는 세계. 세상에 미련을 남기고 죽은 이들이 가는 곳. 명계와 현세의 사이에 존재하는 그 세계. 나는 지금 그 곳에 있는 것일까? 나는 그에게 확인해보기로 했다.
“여긴 지평선 너머의 세계인 거야? 명계와 현세를 잇고 있는, 그 중간 세계야?”
“…네게 그런 말을 한 건 티에라인가?”
그의 질문에 나는 고갤 끄덕였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어머니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생각에 잠기는 것도 잠시,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네게 쓸데없는 걸 가르쳐줬군. 맞아, 네 말대로야. 여긴 그 중간 세계야. 지평선을 건너,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망자들이 사는 곳이지.”
그렇다면 그도, 세계에 미련을 남기고 죽었던 걸까. 내가 목격한 그의 어릴 적의 모습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던 일이었다. 밝고 활기차고, 성실해 보이던 어린 그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때 나는 그런 남자의 등에 대고 불쑥,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고 만다.
“나는 당신을 만난 적이 있어.”
입을 열어 그렇게 말하자 남자는 발을 멈추고 말없이 뒤를 돌더니, 내 얼굴을 바라본다. 그의 차갑고 푸른 눈동자에서는 어떠한 빛도 읽을 수가 없다. 그는 그저 나를 그대로 내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7살 때, 나는 어린 당신을 목격했어. 그 다 허물어져가던 건물에서, 당신은 나를 이끌어주었고, 이야기를 해줬어.”
“…그래, 나도 그 때 너를 만났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눈발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네가 만난 건 나의 기억의 단편. 이 곳을 사는 죽은 이에게는 흔한 일이지. 자신의 집념이나 감정이 크게 작용했던 곳에서 그 기억들의 단편들이 돌아다니는 거야. 현세를 떠도는 기억의 조각들은 그렇게 타인들과 접촉을 하면 사라져. 지금 네가 다시 그 곳을 찾는다고 해도, 그 시절의 나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다.”
그는 술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런 말을 내뱉었다.
“당신의 기억의 단편이라면 어떻게 당신은 나를 만났다는 걸 아는 거야?”
“기억의 단편은 영혼의 조각과도 마찬가지야. 네가 그 조각과 접촉했다는 건 이 곳에 있는 나에게도 전해져. 그래서 나는 네가 ‘그 여자’의 아들이란 걸 알았어. 너와 접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가 나타났으니까.”
그는 그렇게 말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역시, 이 남자는 단순한 환상이 아닌 것 같다. 내가 어릴 적에 겪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건 물론이고, 내가 어머니의 아들이란 것 역시 알고 있다. 이 남자가 적어도, 죽은 ‘그’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 여자, 라는 건 내 어머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야?”
남자는 말없이 고갤 끄덕였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그리 말하고 싶지 않아하는 모양이었다. 여기에서 이야기를 끊어버리는 것을 보고,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머릿속에서 이 남자에 대해 말할 때마다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제멋대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당신이 어딘가로 갈 수 있다면, 어머니를 만나러 가줘. 어머니는 당신을 만나면 정말 행복해할 거야. 어머니는 당신을 꼭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했어.”
남자는 나의 말에 발걸음을 멈춘다. 그의 발걸음이 멈추는 것과 동시에, 한없이 쏟아져 내리던 눈발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어느 샌가 우리는 숲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갑자기 눈부신 햇빛이 비춰져,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크리스탈로 된 커다란 문이, 어느새 그 곳에 두둥실 떠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와 남자는 우두커니 서있다. 남자는 가만히 서서 한참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아니, 나는 만나지 못해. 내가 갈 수 있다고 해도, 그건 이뤄지지 않는 일이야.”
“왜?”
“나는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내겐 멋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없어. 나는 이 곳의 주인에게 고용되어 움직이는 존재에 불과해.”
그렇게 대답한 남자는 손을 들어 커다란 크리스탈 문의 문고리를 붙잡는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머니를 피하고 있는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지?”
문을 열려던 남자의 손이 멈춘다. 그는 고갤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이 곳에서 남자를 만났을 때 보았던 그 차가운 시선이 내게 박힌다. 나는 그 시선에 압도당할 것 같았지만, 애써 입술을 달싹이며 답한다.
“오늘은 당신이 죽은 날이야. 어머니는 오늘도 당신의 묘비 앞에서 펑펑 울겠지. 하지만 당신은 어머니에 대해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나 봐. 어머니가 말했던 것처럼. 어머니는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주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데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가봐. 당신은 어머니를 인정하기 싫은 거야? 당신이 생전에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그러니까 어머니에 대한 화제가 나오면 입을 다물어버리는 거지? 그래서 지금 피하고 있는 거지?”
나의 말에 남자는 눈에 띄게 기분 나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더욱 매서워진다.
“…세속적인 건 두고 와야 한다고 이 곳의 주인은 말했지. 그래서는 이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나는 그 말에 따르고 있는 거다. 내게 그녀와 내가 생전에 어땠고, 그녀가 나를 어떻게 대했고, 이런 건 지금 중요하지 않아.”
그런 말을 내뱉는 남자의 얼굴은 차갑기 짝이 없었다. 거기에 비춰진 감정은 분노에 가까운 어떠한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조금 원망이 담긴 듯하다. 꼭 그런 주제를 꺼낸 나를 향한, 감정인 것만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런 그에게 대답했다.
“당신이 나를 구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세속적인 게 아닐까? 당신은 어린 나를 만났고,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도 알고 있어. 그리고 지금, 당신은 나를 다시 살려주려고 하고 있지. 그러니까 당신은 어머니를,”
“착각하지 마. 나는 어디까지나 내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그 대상이 우연하게도 너였을 뿐이고. 이건 내 의지로서 하는 일이 아니야. 내가 하고 싶어서 너를 구하고 있는 게 아니야. 가뜩이나 네가 그녀와 나의 아들이든 말든, 내겐 상관없어. 네가 어떤 존재였던, 나는 내 일이기 때문에 너를 구했을 거야.”
겁도 없이 섣불리 내뱉은 내 말에 남자는 날카롭게 쏘아붙이듯 내 말을 잘라버렸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남자에게 무슨 말을 했다가는, 그대로 저 남자를 더 화나게 할 뿐일 테다. 남자는 내가 조용해진 것을 확인하더니, 엷은 한숨과 함께 다시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문을 열고 나면 너는 지평선의 끝에 와있을 거야. 너는 거기에서 원래 있는 세계로 돌아갈 수 있어.”
“…알겠어.”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남자는 나의 대답을 듣고 나자 문고리를 열어젖혔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린 그 커다란 문의 너머는 한없이 높고 높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신기하게도 바다가 위에 매달려서 남실남실 흔들리고 있다. 발치에는 하늘을 타고 새하얀 구름들이 떠다닌다. 세상을 꼭 거꾸로 뒤집어놓은 것만 같은 곳이었다. 저 멀리, 둥그스름한 지평선이 보였다.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몰라, 나는 한참 그 신기한 공간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남자의 얼굴로 향했다.
“그,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 거야?”
“그냥 뛰어들어.”
“미쳤어?”
절로 그런 말이 나왔다. 이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니.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하지만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낭떠러지 같은 이 지평선을 향해서 뛰어내리고 나면, 너는 원래 있을 곳에 돌아갈 수 있어. 그게 아니면, 너는 돌아가지 않은 채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건가?”
나는 고갤 내저었다. 아직 죽고 싶지는 않다. 나는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못한 것도 많다. 어머니가 슬퍼하는 얼굴 역시 보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눈을 내리깔더니 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마저도 사라지면 그 여자는 이제 더 이상 살지 못할 거야.”
그 말에 놀라 나는 시선을 옮겨 남자의 얼굴로 향했다. 남자는 무표정하다. 방금 전에 그가 중얼거린 말이 거짓인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 여자를 내가 다시 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그 여자가 이 곳을 찾아오는 건, 그녀의 시간이 전부 끝나고 나서였으면 좋겠어. 그녀가 나를 잊었을 때 즈음에.”
“어머니는 당신을 잊지 못해. 아직까지도 생각하고 있잖아. 당신을 사랑해주고 있잖아. 15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간은 모두 언젠가는 누군가 소중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그건 그 여자 역시 마찬가지고.”
나는 고갤 내저었다. 어머니라면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남자에게 말하자 남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더 이상 그 주제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아무튼, 너는 돌아가야 해. 지금 당장 저 문 너머로 뛰어들어. 지평선이 곧 다시 닫히는 시간이 될 거야. 닫히고 나면 너는 두 번 다시 저 쪽 세상에 돌아갈 수가 없어. 그리고 나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겠지. 그런 건 너 자신도 바라고 있지 않을 텐데.”
남자는 화제를 다시 돌렸다. 역시, 그는 어머니에 대해 말해주고 싶지 않아하는 듯 했다. 더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정말 돌아가지 못한다는 건 내게도 그리 유쾌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나는 심호흡을 쉬면서 문의 가장자리에 섰다. 문 너머로 느껴지는 바람은 유독 따뜻했다. 눈을 내려 발치를 바라본다. 한 걸음 내딛기만 해도 곤두박질칠 것만 같은 거리이다. 이런 곳을 뛰어내리라니,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쉬이 시도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 높다란 높이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걸 느끼며 문가에 두 손을 짚고 매달렸다. 남자는 내가 그러던 말던, 홀로 사색에 잠겨 바닥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문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후드 사이로 드러난 그의 금발을 가볍게 흩날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이윽고 각오를 다짐한 나는, 남자에게 불쑥 물었다. 남자는 내리고 있던 시선을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내용에 따라서는 대답해주도록 하지.”
“만약에 당신이 살아있었더라면, 당신은 나를 당신의 아들이라고 인정해주었을까?”
그 말에 남자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차가운 시선은 다시 아래로 향하고 만다. 남자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
“…그래, 그렇구나.”
그의 대답에 크게 실망해버리는 내가 있었다. 하기야, 어머니도 말했으니까. 생각지도 못하게 생긴 게 나였으니까, 당연한 거다. 만약 그가 어머니를 사랑했더라면, 어머니와 ‘평범한’ 사이였더라면 지금, 그는 당연하다고 대답해주었을까? 내가 ‘평범한 방법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그는 다른 대답을 해주었을까?
“하지만 조금은 생각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
“내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에 대해서. 네가 존재하는 것으로 인해 좀 더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지도 몰라. 그녀와의 관계 역시 다시 생각할 수 있었겠지.”
나는 고갤 돌려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처량하게 느껴졌다. 눌러쓰고 있는 후드가 그 얼굴에 그림자를 지게 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지만 나는 내 선택에 후회는 하지 않아. 그건 내가 했어야만 하는 일이었어. 하지만 누군가 다시 살아가겠느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그러겠다고 답할 거다. 나는 아직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했어. 승리를 눈앞에 두고 죽는다는 건 죽음보다도 고통스러운 일이지. …그러니까 나는 더욱 이 곳에 어울리는 존재이고.”
남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까지 듣던, 짜증이 섞인 한숨 소리가 아닌, 진정으로 사색에 잠겨 내뱉은 한숨 소리였다.
“그 때라면 나는 네가 내 아들이라는 것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내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라는 게 생겼을 테니까. 그 동안 나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달려왔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열등감과 집착이라는 건,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삶을 살게 했지. 그러니까 다시 살아갈 수 있다면, 내가 그 사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더라면, 너와 나의 관계도, 그녀와 나의 관계도, 인생을 향한 나의 생각 역시 바뀌었을지도 모르지.”
“당신은, 자신이 죽은 걸 후회하고 있어? 당신이 살았더라면 좀 더 나은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남자는 내 질문에 픽, 하고 웃었다. 힘없는 웃음소리였다. 처음으로 그는 힘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어디까지나 차갑고 강인해 보일 것만 같았던 그 남자는 그 찰나와도 같은 모습을 보이더니, 그것을 꼭 감추려는 듯 거기에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내 얘기는 이제 됐어. 너는 이걸 전부 잊을 테니까.”
“잊는다고? 어째서?”
충격에 사로잡혀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내고 만다. 겨우 이렇게 그를 만나서 그의 이야기를, 그의 말을 들었는데. 잊는다니.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되었는데, 잊게 된다니. 그런 거는 죽어도 싫다. 어머니에게 그가 살아있다고, 알 수 없는 세계에서 그를 만났다고 전해주고 싶다. 이 남자를 이런 식으로라도 만났다는 걸, 내 기억에 남겨두고 싶다. 남자는 고갤 내저었다.
“그것이 지평선을 사이에 둔 세계들 사이에 있는 룰이다. 네가 현세로 돌아가는 순간, 너는 이 곳에 있던 모든 일들을 잊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게 될 거야. 네게 주어진 시간만큼, 나와 같이 타인의 손에 의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지 않은 채.”
“당신은? 당신도 나에 대해 잊어버리는 거야?”
“나는 이곳의 주민이자 이곳에서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너를 만난 걸 잊지는 않겠지. 하지만 너는 전부 잊게 될 거야. 나는 이제 이곳의 일부이지만, 너는, 단순히 저 세계에서 살아가는 일부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도 안돼. 그건 너무 불공평하다. 나는 그를 잊어버리는데, 그는 나를 기억하고 있다니. 그런 건 용납할 수 없다. 남자는 여전히 납득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부추겼다.
“어서 돌아가. 그 여자가 영영 너를 잃기 전에. 너는 아직 이 곳에 올 사람이 아니야.”
“…나는, 그렇지만, 당신에 대해서 잊고 싶지 않아. 나는 당신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단 말이야. 당신은 내 입장을 생각해본 적 있어? 내가 어릴 때 얼마나 많은 욕을 먹어야 했고, 어머니도 당신이 없다는 이유로 수 없는 모욕을 받아야만 했어. 그런데 어떻게 내가 잊으라고 하는 거야?”
“티에라가 너를 어른스럽다고 자랑스럽게 여기던데, 역시 아직 어리구나.”
남자는 또 짧게 혀를 차고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들리는 건, 질렸다는 의미가 담긴 한숨이었다. 남자는 문 너머를 슬쩍 바라보더니 다시 말했다.
“곧 지평선은 닫히고 말 거야. 네가 스스로 가지 않는다면, 나는 억지로라도 네 등을 밀어서 돌려보내겠어.”
남자의 말에는 강한 힘이 실어있다. 그가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안다. 어쩔 수 없었다. 남자는 진심이었다. 말로는 그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똑똑히 알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알겠다고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문 앞으로 고갤 돌렸다. 쉬운 일이다. 그냥 몸을 던지기만 하면 되는 거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있다.
“…그럼, 나는 이만 갈게. 나를 도와줘서 고마웠어.”
가볍게 목례를 하며 남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던진다. 남자는 내 인사에 반응하지 않고 그대로 굳은 것처럼 마냥 서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모양이었다. 남자의 사색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 괜히 말을 걸었다가 또 내게 화를 낼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티에라를 만나면,”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던 남자가 문득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갤 돌려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이 곳의 일을 전부 잊어버릴 텐데. 내가 전해달라고 해도 전해주지 못하는데.”
“말해줘.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내가 기억을 잃지 않고 건너서 가면, 어머니에게 전할게.”
남자는 나의 말에 말도 안 된다며 웃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제 말과는 달리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티에라를 만나면, 미안하다고 전해줘.”
“…미안하다고?”
“아아, 미안하다고. 그게 전부야.”
나는 고갤 끄덕였다. 그것만이라도 내가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잊게 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꼭 기억할게. 그래서 꼭 어머니에게 전해줄게. 그런 간단한 말 정도는, 나는 기억할 수 있을 거야.”
남자는 내 말에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조나 비웃음이 아닌 부드러운 미소였다.
“고마워, 다니엘. 이제 가도 좋아.”
“…안녕, 아버지.”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내 발은 허공을 짚는다. 나는 그대로 하늘을 향해 떨어져나간다. 넓게 펼쳐진 하늘을 허우적거리면서, 문 너머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을 주시한다. 남자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커다란 문이 서서히 닫히고는, 꼭 처음부터 그런 게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공중을 헤매던 나의 시야가 갑작스럽게 암전되더니,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걱정스러운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눈가에 깊게 패인 다크써클이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했단 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오, 세상에. 다니엘. 두 번 다시 나는 너를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어머니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내 몸은 그렇게 쉬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돼, 댄. 움직이면 안돼. 그대로 있으렴.”
그제야 나는 내 상황을 이해했다. 내 몸은 붕대와 깁스로 가득했다. 아까부터 느끼고 있던 입의 위화감은 산소마스크였다. 나는 힘겹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옷자락으로 눈가를 훔쳤다.
“정말, 정말 다행이야. 네가 다시 살아나서. 나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단다. 오, 다니엘. 나는 정말이지, 두 번 다시 너를 보지 못할 줄 알았어.”
“…미안하대.”
불쑥 다 쉰 목소리로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내 말에 의문을 표하듯 고갤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니, 스위티?”
하지만 나는 기억해내지 못한다. 어째서 내 입 밖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게 누구였지? 나는 어지러운 정신을 다잡지 못했다.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말하려고 힘썼지만 입 밖으로는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미안,하대.”
그 사람이, 어머니에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했어. 그런 말이 머릿속에 맴돌다가, 나는 그대로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서서히 의식의 끈을 놓아버린다. 어머니는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다니엘, 너는 설마 저 지평선 너머의 세계를 다녀온 거니? 하지만 나는 그에 대답해주지 못한다. 나는, 천천히 희미해지는 의식을 겨우겨우 붙잡는 게 고작이었다. 어두워지는 눈앞에서 새하얀 눈밭을 홀로 걷는, 검고 길다란 후드를 걸친 누군가가 떠오른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나에게 차가운 시선이 박혔지만, 나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눈보라가 불어와 그의 얼굴을 가린다. 이윽고 눈바람에 휩쓸리듯, 그는 모습을 감춰버렸다. 어딘가 모르게 그리워지는 꿈이었다. 환상과도 같이, 흐릿한 꿈이었다.
샹들리에가 낙하하여 얻은 나의 부상은 오래오래 이어졌다. 다음날 눈을 뜬 내게 들려준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다들 내가 곧 죽을 거라고 했단다. 수술을 끝마치고도 나의 의식은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자기, 모두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내 심박수가 다시 뛰기 시작했다고 했다. 말하자면 나는 죽다가 살아난 것이다. 어머니는 천사가 도와주었다며 눈물을 머금었지만, 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의식을 잃은 동안 꿈에서 보았던 그 새하얀 눈밭의 남자가, 나를 도와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은 것이었다. 그 남자가, 나를 죽음으로부터 살려주었다고.
그러나 나는 그 꿈 속에서 본 남자가 내가 2달 간의 기나긴 입원 생활을 끝낼 때까지, 결국 어떤 존재였는지 끝까지 떠올리지 못했다. 어딘가 모를 향수만이 남아있었다. 조금은 그립고, 조금은 어렴풋한 기억. 그 남자가 어떤 존재였던 간에, 나에게 중요한 인물이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향수조차,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그 남자에 대해 마음 속으로만 담은 채, 일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퇴원을 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시작한 지금도, 그 남자의 꿈은 계속 되고 있다. 그에 대해 잊을만하면 떠오르는 그 꿈. 나는 또 언젠가 그 남자의 꿈을 꾸리라. 새하얀 눈밭을 걷는, 그 쓸쓸한 등을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리라. 그 때엔 그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다. 그가 어떤 자인지, 내게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그가 누구길래, 나에게 이렇게 큰 의미를 가져오는지 알고 싶다. 그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그 남자를 만난 건 단순히 나의 꿈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