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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구두

Esoruen

 

옥도사변

타가미 X 에노키

과연 마을에서 그 아이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단정하게 양갈래로 묶고, 산으로 들로 떠돌며 흥겨운 노래를 불러대는 목장의 아가씨는 마을 사람들에게도, 여행자에게도, 지나가는 길고양이에게도 평등하게 친절을 베푼다.
영주가 소유한 목장의 유일한 사용인. 가족은 없지만 늘 기운 찬 미소를 잃지 않는 목동. 흙과 건초로 더러워진 앞치마를 손으로 털고, 손수 양의 털을 깎거나 소의 젖을 짜며 노래하는 소녀의 이름은 에노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이름 대신 ‘목장 아가씨’라 불렀고, 그건 마을 구석에 위치한 구두공방의 어린 수제자도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주인 어르신 심부름으로 왔어요!”

오늘도 활기차게 인사하며 공방의 문을 연 소녀는 일하고 있는 수제자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가죽을 다듬던 수제자, 타가미는 심각한 표정으로 일하다 말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제 스승을 불러다 주었다. 영주의 심부름이라면 아마 주문한 구두를 가져오라는 것이겠지만, 그런 건 목장의 사용인이 아닌 성의 사용인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이래서 높으신 분들의 생각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소년은 마음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그의 스승은 이 일을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 여기 가져가렴. 부인의 생일 선물로 주고 싶다 하시더니, 몰래 준비하기 위해 널 보내셨나 보구나. 성 안의 하인이 오면 금방 눈치 챌 테니.”
“엇! 어떻게 아셨어요? 마님에게는 비밀이에요!”
“그래, 얼른 가렴. 잘 가라 에노키.”

돈은 이미 영주가 지불했으니, 남은 건 무사히 돌아가는 것뿐이다. 에노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방을 나섰고, 타가미는 제 시야에서 사라지는 에노키의 발을 유심히 바라보며 작은 고민에 빠졌다.
목장 일을 하는 사람은 좋은 신발을 신을 수 없다. 그러니 상처와 흙으로 뒤덮인 신발을 신고 다니는 건 이해하지만, 일터를 벗어나 마을에 나올 때 까지도 저런 복장을 해야 할까. 옷은 최대한 깔끔하게 입었지만, 신발은 마땅한 것이 없는지 늘 신고 있는 그 신발이다. 타가미는 그것이 어쩐지 대단히 안쓰럽다 생각되었고, 문득 이 공방에 남아도는 가죽조각들이 생각났다.

‘조각들을 모으면, 신발 한 켤레 정도는.’

시작은 단순한 동정이었다. 푼돈을 받고 기술을 배우는 자신조차도 신발은 그럴싸한 걸 신고 있는데, 마을 영주의 사용인이 저 꼴이라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차피 신발을 만드는 연습을 해야 하는 참이니, 하나 만들어 보자. 마을사람들이 하나같이 예뻐하는 목장 아가씨에게, 딱 맞는 외출용 구두를. 
그렇게 시작된 타가미의 첫 작품은, 굽이 낮은 여성용 구두가 되었다.
낮에는 스승이 시킨 일을 하고, 밤에는 구두를 만든다. 그렇게 며칠 정도 고생을 하자, 여러 가죽을 이어 만든 얼룩덜룩한 색의 구두가 완성되었다.
완벽한 모양, 튼튼한 구조. 아직 배우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훌륭한 구두였지만, 색은 보고 있기 힘들 정도로 지저분하다. 이래서야 색이 아예 없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자, 타가미는 스승이 쓰다 남겨둬서 말라가는 염료들이 떠올랐다.

‘맞아, 그렇게 하면 되겠네.’

남은 염료들을 한 그릇에 모으면, 모든 색이 섞여 검은색으로 변한다. 타가미는 그 오묘한 검은색을 제가 만든 구두에 발랐고, 그렇게 보기 싫던 얼룩구두는 깔끔한 검정구두로 다시 태어났다.
이제 날이 밝으면 이걸 주인이 될 사람에게 가져다주면 된다.
과연 모두에게 상냥한 목장의 아가씨는 제 구두를 보고 뭐라고 해줄까. 고맙다며 까르르 웃을까. 아니면 이런 좋은 선물은 받을 수 없다며 곤란해 할까. 걱정인지 기대인지 모를 생각을 품고 잠든 타가미는 모든 일이 잘 풀릴 줄 알았지만, 그건 아직 어린 수제자의 환상에 불과했다.

“네? 구두를 팔았다고요?”

아침에 일어난 타가미는 비어있는 제 책상 위를 보고 얼이 빠져버렸다.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는 눈앞이 절로 깜깜해졌다. 자신보다 일찍 일어난 스승이 제가 만든 첫 작품을 보고, 그 가치를 높게 여겨 공방에 온 고객에게 팔아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래. 비싸게 팔았으니 기뻐해도 좋아! 언제 그런 걸 만들었어? 돈은 여기에….”
“누구에게 팔았습니까?”
“그건 왜? 뭐, 첫 작품이니 사간 사람 얼굴이 궁금한 건 당연한가. 옆 마을의 은행가야.”

아아. 그걸 말해선 안 되었는데.

스승은 아무 생각 없이 제 과오를 전부 말했고, 타가미는 대답을 듣기 무섭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구두를 되찾아야 한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목장 아가씨를 위한 구두였으니까. 설령 상대가 공주거나 마녀라고 해도 신게 놔 둘 수는 없었다.
절실함은 사람이 뭐든 하게 만든다 하던가. 말도 마차도 없이 옆 마을 까지 뛰어간 타가미는 은행가와 만나 사정을 말했지만, 돌아온 것은 냉정한 대답뿐이었다.

“미안하군, 내 딸이 이 구두를 너무 마음에 들어 해서 말이지. 돌려 줄 수는 없네. 이미 딸이  신고 놀러 가버렸거든. 그것보다 다음에도 구두를 만들어 주지 않겠나? 비싸게 사겠네.”

평소라면 너무나도 기뻐할 소식이지만, 구두를 돌려받지 못한 시점서 타가미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솔깃한 제안에 대답도 하지 않고 뛰어나간 타가미는 은행가의 딸을 찾아 온 마을을 헤매었다.
익숙하지 않은 민가, 처음 보는 길,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찾기 위해 타가미는 땅바닥만을 보며 걷는다. 제가 만든 구두를 찾기 위해. 이 세상에 그 어떤 것과도 같지 않을 검은색의 구두를. 목장 아가씨를 위해 만들어진 구두를.

“찾았다.”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갈 때 쯤. 소년의 노력은 결실을 낳았다.
어두운 뒷골목, 향수 가게를 들렀다 나오는 소녀의 발에서 제가 만든 검은 구두를 발견한 타가미는 마지막 남은 인내심으로 상대에게 직접 구두를 벗어줄 것은 요구했다.
‘돈은 도로 주겠습니다, 그건 당신의 구두가 아닙니다.’
그렇게나 단호하게 말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은행가의 딸은 그의 마지막 인내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싫어요. 이건 내 거예요. 절대 안 벗을 건데요?”

그렇다면, 직접 벗겨가는 수밖에.
자비도 이해도 남지 않는 불쌍한 수제자는 뒷골목에 버려진 의자 다리를 뽑아, 제 구두를 마음대로 대하는 무뢰한에게 다가갔다.

 

똑똑.
늦은 밤, 막 일을 끝내고 잠에 들려던 에노키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경계하지도 않고 목소리를 내었다. ‘누구세요?’ ‘나야.’ 이름을 말하지 않는 소년의 목소리는 분명히 익숙해서, 에노키는 잠깐 고민하더니 문을 열어버렸다.

“아.”

구두 공방의 남자애다.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얼굴은 자주 봤었지. 순진한 목장 아가씨는 타가미에게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거, 가져. 너 신으라고 만든 거니까.”

절대 너 이외엔 아무도 신게 하지 마.
경고에 가까운 한마디를 남긴 소년은 도망치듯 언덕을 내려갔다. 타박타박. 검붉은 액체가 묻은 구둣발소리는 요란했지만, 갑작스러운 선물을 받은 에노키는 당황해서 발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채지도 못했다.

“와아, 예쁜 구두네!”

염료들이 섞여 피어오르는 불쾌한 냄새는 피비린내도 잊게 하고, 밤하늘 같이 검은 빛깔은 피 얼룩 정도는 눈에 띄지 않게 한다.
이 구두가 어떻게 제게 오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목장 아가씨는, 기쁜 마음으로 제 발에 딱 맞는 검정구두를 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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