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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던 날 밤

엔유리

 

앙상블 스타즈!

사쿠마 리츠 X 로아이다 유리

01.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유리를 에워싼 풍경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교정의 모습이 리츠의 붉은 눈동자에 선명하게 비쳤다. 몽롱한 의식 속,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벗어나려 눈을 몇 번 깜빡이면 유리는 상냥한 미소로 리츠의 머리를 어루만져주었다.

그 뒤는 언제나와 같은 일상이었다. 졸지 말라며 핀잔을 주는 이즈미 몰래 간식을 집어 먹는 츠카사에게 그러다 혼날지도 모른다며 한마디 던지는 아라시와 그냥 놔두라며 웃어버리는 레오에게 종이와 펜을 가져다주는 유리. 리츠는 그런 떠들썩한 스튜디오를 한눈에 담으며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모두가 함께 웃고 떠드는 이 평화로운 나날들이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고, 일순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앞으로도 내 눈에 띄는 곳에 있어 줘, 유~쨩.”

 

왜 굳이 그런 말을 꺼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이 너무 즐거우니까? 그래서, 어디론가 가버린다면, 괴롭고 외로워서 견딜 수 없어질 테니까? 조곤조곤 내뱉는 그 말씨에 유리는 별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며 생글거렸다. 으~응, 역시 괜히 말했나. 리츠는 유리의 대답에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냈다. 왜 그러는 거지 싶어 그 표정을 잠시간 빤히 쳐다보던 유리도 이해가 어렵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내 표정 읽기를 그만두고 제 무릎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악보들을 정리하던 유리. 리츠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본래 악보가 있던 자리에 익숙하게 제 머리를 올려놓았다.

 

“곁에서 떠나지 마.”

 

이전의 단호함에 나른함이 섞여들어 간 목소리였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유리의 얼굴이 이내 기울어졌다.

 

“오늘따라 진지하네, 리츠. 무슨 일 있어?”

“으~응, 딱히. 늙은이의 기우 같은 거.”

 

리츠가 눈꺼풀을 느릿하게 내렸다.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정쩡하게 웃는 유리의 표정이 선하게 떠올랐다. 살갗 너머로 내려앉는 온기에 고작 상상일 뿐임에도 리츠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제 얼어버린 감정이 무색할 정도로 따사로운 빛. 눈을 뜬다면 이번에야말로 시야가 멀어버려서 아무것도 담지 못할 성싶었다. …이젠 그런 거, 아무래도 좋지만. 유리를 매개체로 만들어진 미소의 뒷맛은 어쩐지 씁쓸해서 리츠는 괜히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졸음이 밀려왔다. 결국, 어째서 그런 기분이 들었는가에 대해선 인지하지 못 했지만,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02.

 

창밖에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리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교실 내에 만연해 있는 습기가 몸에 진득하니 달라붙어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막 일어나 초점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눈동자에 담긴 잿빛의 하늘이 불순물이 섞이어 들어간 피처럼 탁했다. 빛 한 줌조차 구름에 막혀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풍경도 원래부터가 부옇게 안개 낀 세상을 살아가던 리츠에겐 평범한 일상 속 풍경이었을 테지만 왜일까, 오늘은 쏟아지는 비가, 잿빛의 어둑한 하늘이, 이 눅눅한 분위기가 그렇게 이질적일 수가 없었다. 꿈에서 깨고 보니 펼쳐진 더 꿈같은 광경에 헛웃음만이 터져 나왔다.

마음만 먹으면 몇 시간이고 더 잘 수도 있던 수면을 방해받았음에도 리츠는 별로 개의치 않다는 듯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구태여 확인하지 않더라도 교실 안에 자신 이외의 인물이 있을 리 만무했으니 여전히 시선은 창밖에 고정해둔 채였다. 이대로 밖으로 나간다면 저도 함께 저 어두컴컴한 풍경에 녹아들어선 빗물에 쓸려 가리라. 영양가 없이 온통 칙칙하기만 한 풍경에 눈이 슬 피로해졌다. 이대로 눈을 감는다면 다시 잠에 빠져버릴지도. 빗방울이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소리만이 리츠의 귓전을 때렸다. 그리고 일정하게 울리는 진동음…….

 

…진동?

 

빗소리에 섞여들어 순간 인지하지 못했다. 리츠는 전혀 자신을 봐주지 않는 제 주인에게 열렬히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발신자를 확인하고서 이걸 받을지 부재중으로 둘지 잠시간 고민하던 리츠는 진동이 멈추기 직전, 결국 핸드폰을 귀에 가져갔다. 쿠마 군? 하고 물어오는 익숙한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정도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 어디야.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물었다. 애초부터 별로 숨길 생각도 없는 듯, 리츠는 뜸 들이지 않고 교실이라 대답했다.

 

―진짜 안 오려고?

 

특유의 찌르는 말이 리츠의 말문을 닫아버려서, …내가 거길 왜 가야 하는데? 하고 되묻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돌아오는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상대방은 언성을 높인다. 평소보다 한 층 더 무게 실린 잔소리. …리츠는 무심코 전화를 끊어버렸다.

 

 

 

 

 

03.

 

―전원이 꺼져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착잡한 표정으로 발신을 그만두었다. 아무 표정도 지을 수가 없었다. 지독하게 흐린 하늘만큼이나 속은 타들어 가서 숨을 내뱉을 때마다 케케묵은 잿더미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빗방울이 속에서 불씨가 되어 번져간다. 완벽한 자기관리, 몸에 좋지 않은 거라곤 절대 엄금하는 이즈미는 오늘에서야 술로 시름을 달래는 사람들의 심정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들고 있어봤자 의미 없는 휴대전화를 코트 주머니에 찔러넣고 왼편을 바라보았다. 제 머리칼만큼이나 붉게 물든 눈시울로 시선을 발끝에 떨군 채 울고 있는 어린 후배는 아무래도 근시일 내에 회복하긴 힘들어 보였다. 이즈미는 말을 고르고 또 고르며 그 옆을 지키던 아라시에게 카사 군을 부탁한다는 한마디만을 남기고 곧장 1층 로비로 향했다.

여전히 빗발은 세차다. 새어 나오는 곡소리를 뒤로하고 그는 바깥을 향해서 우산을 펼쳐 들었다.

 

“릿츠에게 갈 생각이지?”

 

그 목소리가 들린 것은 이즈미가 건물 밖으로 발을 한 발짝 떼었을 때였다. 이즈미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몸을 돌렸다. 검은 정장 차림의 츠키나가 레오. 웃음기가 빠져 사뭇 진지한 모습의 그가 이즈미를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먼저 가버린 줄 알았더니.”

“장송곡을 쓰긴 싫어서.”

 

이즈미는 대답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스오는 좀 어때.”

“계속 울고 있지 뭐. 일단은 나루 군에게 맡겨두고 오긴 했지만…….”

 

…카사 군 앞이라서 말 못 하고 있을 뿐이지 나루 군도 못지않게 슬플 거야. 뒷말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즈미의 한숨 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제 동료들을 생각하자니 마음이 참 복잡했다. 위로할 말씀이 없다는 짧은 한마디와 함께 국화를 두고 가는 이즈미의 모습이 놀랍도록 덤덤했지만, 이즈미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 터. 그래도 그곳에서 자신마저 무너져버리면 안 되니까, 이즈미도 자신을 기반으로 올라서는 녀석들을 생각해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것뿐이었다.

레오가 이즈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와 닿는 손길에 눈물이 비집고 나올 것만 같았다. 빗속을 걷는 두 사람의 어깨가 유난히도 무거워 보이는 날이었다.

 

 

 

 

 

04.

 

“셋쨩.”

 

레오와 이즈미가 도착하기 전까지 미동 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리츠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나왔다. 부정의 끝은 원점. 아무리 부정하려 애써도 저를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현실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던져두는 통에 리츠는 더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유~쨩은…….”

 

리츠는 어렵사리 운을 떼었다. 첫마디를 뱉었음에도 말문이 턱턱 막히는지 리츠는 말을 자꾸만 끊어냈다.

있잖아, 정말로, 유~쨩은…….

 

…죽었어?

 

본인 입으로 시인하기까지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리츠의 눈에서 말간 액체가 후두두 떨어졌다. 긍정의 말도, 부정의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애수를 담은 물빛 눈만이 리츠의 붉디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유리의 가족에게도 서슴없이 건네던 위로의 말이 어째서인지 리츠 앞에서는 잘 나오지 않았다. 가히 긍정을 말하고 있는 침묵이었다.

그렇구나. 우는 낯으로 리츠는 웃었다. 굳이 도피처는 찾지 않았다. 부인은 곧 개미지옥. 잠식되길 거부하려 허우적댈수록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물밀 듯 쏟아져 내려서 숨이 막혀왔다. 리츠는 말을 아끼는 두 사람을 지나 교실 문을 세차게 열어젖혔다.

 

“가볼게.”

 

두 사람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리츠는 그 마지막 말만을 남기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면서 빗소리 이외의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이내 이즈미는 근처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쿠마 군, 괜찮을까. 하고 말문을 텄다. 레오는 그러는 세나부터가 괜찮지 않잖아. 라고 반문했다. 그들 사이에 씁쓸한 기류만이 감돌았다. 입안이 참 썼다.

사고사였어. 음주운전 차량이었고. 뺑소니에 목격자도 없어서 발견이 늦었다나 봐. 병원으로 이송됐을 땐 이미 손 쓸 수가 없었대. 카사 군, 그 소식 듣고 종일 울었어. 나루 군에게 부탁하고 오긴 했지만……. …아마 지금도 울고 있을 거야. 그럴 수밖에. 그 녀석, 로아라면 조건 없이 따랐으니까. …사실 실감이 잘 안 나더라. 모두가 울고 있는데, 로아 그 녀석만 환하게 웃고 있었거든. …그래, 차라리 꿈이었으면 했어. 아마 쿠마 군도 같은 생각이었겠지.

…하고 싶은 말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이즈미는 제 잿빛 머리칼을 스스로 흩뜨렸다.

 

 

 

 

 

05.

 

리츠는 결국 유리의 장례식이 끝나기까지 단 한 번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지켜볼 용기 따위 있을 리도 없었다. 그 길로 곧장 향한 집 안이 고요했다.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서 리츠는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늘 시선의 종착점에서 저를 마주하고 있던 유리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리츠는 벽에 기댄 채 그대로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눈을 감으면 아득한 어둠 저편에서 유리의 얼굴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깨지 않는 몽환 속에서 유리와 영원을 보낼 수 있다면. 일순간, 리츠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안 돼. 이미 유~쨩을 알아버려서, 이젠 유~쨩이 없는 삶 같은 거 살 수가 없어.”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좋았을까. 이제 와 후회해본들 소용없는 일이겠지만. 허탈한 표정으로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를 휘감은 비참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사랑해, 사랑해. 닿지 않을 그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갈라진 음성이 바싹 말라버린 낙엽처럼 버석버석했다.

리츠 안에 바스러진 공허감만이 가득 들어차기 시작한다. 의욕 없이 앉아있으려니 얼마 지나지 않아 피로가 몰려왔다. 곧 과부하가 걸린 머리가 열을 내기 시작했다. 이젠 정말로 무리, 리츠는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바깥의 빗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달은 여전히 구름에 가려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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