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끝내볼까요
피노
명탐정 코난
진 X 그랑
“감정으로 일을 행하는 사람만큼 쓸모없는 사람은 없지.”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대답 뒤로 이어지는 침묵에 그랑이 입술을 깨물어 뜯었다. 상대방의 독백,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굳이 제 귀로 직접 듣지 않아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휴대폰 너머로 뚝, 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랑은 제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 제 바지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으며 실소를 내뱉었다. 배의 상처가 아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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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널 위해 죽어줄 수 있어.
수년 전 뱉었던 말이 문득 머릿속을 떠다녔다. 단 한 번도, 자신이 한 말에 대해 후회한 적은 없었다. 지금 역시 후회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후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머릿속 깊게 뿌리박은 생각은 쉽게 변치 않았다.
“어차피 진도 방탄복을 입었는데 뭐 하러 그렇게 달려들어서 총알받이를 한 거야? 멍청하기는."
키얀티가 자신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는 그랑을 빤히 쳐다보다가 제 손가락으로 그랑의 배를 살짝 쓸며 물었다. 닥쳐줄래, 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튀어나와 입 안을 맴돌았지만 키얀티의 발을 밟아주며 웃어주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멍청하다는 말을 들어도 자신이 멍청했던 것은 맞았기에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생각보다 몸이 앞서서 진을 향한 저격을 대신 맞았던 것. 일을 치르고 난 뒤 돌아가는 길에는 무엇보다도 차가운 진의 시선과 함께 배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감각을 같이 느꼈어야 했다. …다시 생각하니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은데.
“…다음 일은 ‘그 분’에게 직접 받으라더군.”
옆에서 조용히 고기를 썰던 코른이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그래, 알겠어. 흔들리는 동공을 숨기기 위해 눈을 활짝 접어 웃고,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답했다. 좋지 않은 예감에 코른과 키얀티에게 식사비는 달아둘게, 라며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네고는 자리를 빠져나와 휴게실로 향하였다. 일을 치르고 나면 늘 있는 일이지만, 긴장되고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장님, 안색이 안 좋으신데, 어디 아프신 것 아녜요?”
”카츠토 군. 오늘 마감 좀 부탁할게. 조금 일이 생겨서.”
매니저에게 알겠다는 답변을 듣고 나서 저를 걱정하는 직원들의 눈길을 뒤로 하고 그랑이 레스토랑을 나섰다. 전화, 해야겠지. 그분과의 통화를 생각하자니 벌써부터 머리에 쥐가 나는 것 같은 느낌에 한숨을 푹 쉬었다. 바보 같은 소리였지만, 이대로 시간이 흐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랑이 제 차에 올라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져물어가는 해가 저의 모습과 겹쳐 보여 괜히 생각이 복잡해지는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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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탓에 일을 망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굳이 진의 일이 아니더라도 동정심같이 필요 없는 감정 하나 하나에 연연하다가 일에 지장을 줄 뻔 했던 경우가 이전에도 적지 않게 있었기에, 아무리 그분과 조직원 대부분의 신뢰를 받는 그랑이라도 이럴 때면 다수의 비난의 목소리에 시달려야했다. 조직에 오래 있기도 하였고, 개인적인 능력 역시 뛰어났던지라 그동안 모두 그랑의 일을 눈감아주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다른 감정도 아닌 사랑이라는 허망하고 헛된 감정 하나에 일을 그르칠 뻔 했으니. 한 번 그랬다면, 두 번은 못 할 것도 없다. 그 분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조직에 쓸모가 없는 자들은 없앤다.’
그랑은 오늘, 그분에게서 마지막 지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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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나.”
당연히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들어간 집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짐과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란 나머지 그랑이 현관 바닥에서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진, 언,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1시간 전 즈음인가.”
눈앞의 상황이 아직 믿기지 않는 것인지 눈을 부비는 그랑의 손을 진이 잡아 일으켰다. 평소였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상황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만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직, 배의 상처가 낫지 않은 건가?”
진이 그랑을 일으킬 때 붙잡은 손을 놓지 않고, 그 두 눈을 직시하며 물었다. 별로? 저도 방탄복을 입었던 상태였기에 그리 큰 부상을 입지 않았을뿐더러, 애초 상처 때문에 넘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 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답하였다. 그럼에도 진이 마치 그럼 왜 넘어졌냐, 는 투의 질문을 담은 시선을 계속해서 보내자 그랑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손을 살며시 빼고는 제 소파로 걸어가 엎드렸다.
“다음 맡은 일은 뭐지?”
“내가 그분이랑 통화 한 사실이 동네방네 다 소문 나있네. 근데 내용은 나만 알고…~ 흐흥, 안 알려줄 건데?”
내일 아침에 나갈 거야. 알려주지 않겠다고 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제 말이 끝나자 옆으로 다가와 소파에 걸터앉아 제 머리칼을 쓰다듬는 진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던 그랑이 입을 열었다. 다정한 손길이 머리칼 위로 느껴지는 것이 좋아서, 미안해서 그래. 어쩔 수 없었던 거야. 그렇게 치부하며 아무렇게나 지어낸 일정을 줄줄 읊었다. 소파에 묻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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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평소였으면 잠시의 틈도 없이 이리저리 바삐 움직였을 그랑이 커튼을 치고 아침햇살을 한껏 받더니 욕실로 들어가 따스했던 햇살을 천천히 씻어냈다. 나와서는 한 올 한 올 머리를 말리고, 며칠 전 새로 산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며 커피도 내렸다. 그 모든 행동이 어색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아침.”
목소리도 주인의 행실에 맞춰 늦장을 부리는 것일까, 한껏 잠겨있는 목소리를 듣고 진이 작게 웃음을 흘겼다.
“꽤나 여유를 부리는군.”
“오늘은 그래도 괜찮아.”
커피를 홀짝이던 그랑이 테이블에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쭉 기지개를 폈다. 여느 때보다도 편안하고, 고요한 상황이 어색해 혼자 너털웃음을 짓다가도, 곧 이 어색함도 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 분이 내린 임무는 중의적이었다. 조직에 쓸모없는 사람. 이것은, 저만은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 진 역시 그 ‘쓸모없는 사람’에 내포된 사람이겠지. 혼자만의 감정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분은 그랑에게 자살과 살해. 두 가지 선택지를 준 것이다. 그랑이 어떤 선택을 할지 알면서도. 잔인한 사람이었다.
“슬슬 나가봐야 해.”
그랑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겉옷을 대충 챙겨 입고, 총기 케이스를 어깨에 멨다. 여느 때처럼, 그의 긴 머리칼을 슬 잡아 입을 맞추며 그를 위한 기도도 했다.
“진, 있잖아.”
평소였으면 이미 집 문을 열고 나섰어야 할 그랑이 문을 향하던 중 다시 뒤돌아 진에게 다가섰다.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진을 황금빛 눈에 한참이나 담고, 또 담아냈다. 그러곤 우물쭈물하던 입을 열었다.
“사랑해. 이게 내 마지막 욕심이야.”
진의 입술 위로 그랑의 차가운 손이 닿았다.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 위로 그랑의 입술이 포개졌다. 몇 초 되지 않아 떨어졌지만, 이 상황에 대한 당황스러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언젠가는 너도 나를 위한 기도를 해줘.”
하지만 그 감정을 표하기도 전에 그랑이 제 할 말을 마치고 문을 나섰다. 찰나에 보인 그랑의 눈물에 불안함이 온 몸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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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이 아득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네가 아른거렸다.
사랑했어. 이제, 전부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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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내 품에 안겼다. 아침에 문을 나설 때와 비교해서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새로 샀다고 자랑을 늘어놨던 와이셔츠, 언제나처럼 같은 길이로 매어진 넥타이. 그런데, 그런 너를 품에 안았을 때 느껴지는 감각이 너무 냉랭해서. 그제서야 아침에 나누었던 대화들이 다시금 떠오르며 머리를 채웠다.
“나를 위한 기도를 해줘, 라고…”
이런 의미였나. 허탈함이 저를 가득 채웠다. 언젠가, 네가 나를 위해 죽어줄 수 있다고 했던 것이 머리를 스쳤다. 언제나 다가오는 네게서 발걸음을 뒤로 하며 도망쳤던 나였는데, 그런데도 너는 날 위해 죽었다. 그런 주제에 마지막까지 내게 사랑을 속삭였고, 나를 위해 기도했다. 바보 같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 한다.”
그간 네게 답하지 못했던 말들을 차례차례 전부 쏟아냈다. 무언가 목이 턱 막히는 느낌이 나나 싶었는데, 눈에서부터 투명한 액체가 툭 떨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슬픔이라는 감정이 너무나 혐오스러웠다. 그럼에도, 그 슬픔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 떨어지는 눈물을 닦지 않고 그냥 흘려보냈다.
“Vivo per te”
널 위해 산다. 네게 수도 없이 죽지 말라는 기도를 들어왔다. 그러니 살아야 했다. 날 위해 죽은 널 위해서라도 살아야 했다. 허리를 숙여 네 차디 찬 입술에 입술을 잠시 포갰다 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네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네 사랑이 끝나고 나서 비로소, 내 사랑은 시작되었다.